[WSF 2011]⑧'은밀한 보호주의' 출현..`나부터 살고 보자!`
금융위기 이후 구제금융, 자국통화 절하..비전통적 보호주의 등장
각국 이해관계 따라 FTA체결 급증, 지역간 경제권역 블록화 진전
입력시간 :2011.05.09 08:00
[이데일리 권소현 기자] 2009년 2월14일 미국 상하 양원이 `바이 아메리칸` 법을 통과시켰다. 미국내 기업들이 공공부문 사업을 전개할땐 미국산 철강과 철강제품을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전문가들은 바이 아메리칸법의 통과를 금융위기 이후 국제 통상질서의 변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한다. 금융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자율과 탈규제를 외치며 자유무역을 주창하던 국가들이 막상 위기가 닥치자 서로 나부터 먼저 살겠다고 보호무역 강화에 나섰다는 얘기다.
각국간 무역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2000년대 초반 시작된 도하개발아젠다(DDA) 논의는 더이상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양자간 또는 지역내 서로 이해관계가 맞는 국가들간 손을 잡는 양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미국의 경제 헤게모니가 급격히 약화한 상황에서 보호주의의 강화와 지역별 이합집산 현상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구제금융·경기부양..비전통적 보호주의 등장
2008년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금융위기가 본격화하자 그해 11월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은 G-20회담에서 더이상 새로운 무역장벽을 만들지 말자는데 합의했다. 이른바 `스탠드 스틸`(Standstill, 추가 보호무역조치 동결)이다.
하지만 이 약속은 오래 가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러시아는 수입 자동차 부분에서, 인도는 외국산 철강제품에서 큰 폭의 수입관세를 부과하며 G20 협의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국제 민간무역 연구기관인 GTA(Global Trade Alert)에 따르면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 11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1년여간 무려 300여건에 달하는 보호무역 조치가 경쟁적으로 도입됐다.
대부분의 국가가 겉으로만 공조를 외칠 뿐, 실제로는 수입을 억제하고 자국 기업의 수출산업을 지원하는 보호주의의 장벽을 속속 도입한 것이다.
특징적인 대목은 관세부과나 무역구제(trade remedies)처럼 곧바로 무역마찰로 이어질 수 있는 직접적인 조치 보다는 은밀히 자국기업을 지원하는 간접적인 조치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금융위기 이후 1년새 각국의 구제금융조치가 전체 보호무역조치의 3분의 1이 넘는 101건에 달했다는 점이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우선 고사 직전까지 몰린 자동차 산업이 가장 먼저 구제금융 대상이 됐다. 2008년 미국은 자국 자동차업체인 크라이슬러와 GM에 구제금융을 제공했고 스웨덴 역시 사브와 볼보에 대한 지원사격에 나선 바 있다. 프랑스는 2009년 르노와 푸조를 지원했다.
정부조달, 수출보조금, 위생검역 등 세계무역기구(WTO)로부터 제재를 피해갈 수 있는 은밀한(musky) 보호무역조치도 경쟁적으로 도입됐다.
지난 2010년 미국이 수입식품에 대한 검사와 해외 식품가공공장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내용의 식품안전법안을 개정하고, 유럽연합(EU)이 수입제품에 포함된 유해물질 규제를 강화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은밀한 보호무역조치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홍석빈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금융위기 이후 정책금융 등 전통적인 보호무역 정책과는 다른 비전통적인 보호무역조치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통화가치 절상 막아라 `특명`
금융위기 이후 두드러진 현상인 각국간 환율 전쟁도 따지고 보면 보호무역조치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호주의 경제학자 맥스 코든은 의도적으로 자국의 통화가치를 절하시켜 자국의 수출과 수입상품의 경쟁력을 조절하는 것을 `환율 보호주의`라고 정의하고 있다.
환율전쟁은 특히 신흥국들에게 민감하다.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빨리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해외 투자자금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자국의 통화가치가 급등하고 그 결과 수출경쟁력이 타격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은 외국인의 주식과 채권투자에 2%의 거래세를 부과했지만 자국통화인 헤알화의 급등이 진정되지 않자 채권에 대한 거래세를 두차례에 걸쳐 추가적으로 인상했다. 태국도 외국인 채권투자소득에 대해 15%의 세금을 부과했고, 대만과 인도네시아는 해외 자본이 사들일 수 있는 투자범위나 보유기간을 제한했다.
일본은 지난해 9월 미국의 양적완화조치로 달러화가 풀리면서 엔화가 급격히 절상되자 6년여만에 처음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했다. 한국 역시 선물환 규제, 외국인 채권투자 원천징수 부활, 은행세 도입 등 각종 규제조치를 통해 환율하락을 저지하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국도 대중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중국에 위안화 절상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급기야 지난해 9월 미 하원에선 공정무역을 위한 환율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인위적으로 통화가치를 절하시키는 국가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에 대해 상계관세를 물리는 방안이다.
이홍직 한국은행 국제경제실 과장은 "선진국들이 경기부진, 개도국과의 무역수지 불균형, 내국인 저숙련 일자리 감소 등에 대응해 자국 산업과 내국인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했다"며 "특히 자국 통화가치의 절하는 보호무역조치의 주된 수단으로 활용했다"고 말했다.
◇맞는 짝 찾아 자유무역..경제권역 블록화
이 같은 보호무역주의가 고개를 들면서 기업들의 우려감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 기간 중 세계 각국의 최고경영자(CEO)들은 비즈니스 서밋에서 보호무역주의를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여기에 다자간 무역협상인 DDR 협상 타결을 위해 G20 정상들이 직접 나설 것을 촉구하는 등 자유무역 확대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다행히 세계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는 가운데 보호주의 확산에 대한 경각심이 형성되면서 각국은 더 이상 보호무역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대신 전세계 국가들은 서로간의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각자 짝을 찾아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있는 형국이다. WTO에 따르면 FTA를 포함한 지역무역협정(RTA) 발효건수는 2007년 14건에서 2008년과 2009년 각각 26건과 27건을 각각 기록했고 2010년에도 15건에 달했다.
글로벌 경제의 권력구도가 미국 주도에서 다극체제로 전환되면서 지역간 블록화 현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 남미 국가연합 창설 등이 대표적이다.
명진호 국제무역연구원 연구원은 "각국이 보호무역을 추진하면서도 수출을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주요국과의 FTA를 추진하는 모습"이라면서 "FTA 체결을 통한 수출진작 노력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