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만원 들여 창업한 50대, 명품백 5조 '대박'

2011. 6. 26. 10:04분야별 성공 스토리

[CEO 경영이야기] 무작정 도나 카란(DKNY 디자이너) 찾아가 ‘주문 달라’ 요청
‘버버리·코치백 만드는 남자’ 박은관 시몬느 회장(1)
기사입력 2011.06.21 10:35:05 | 최종수정 2011.06.21 13:48:57

박은관 시몬느 회장은 글로벌 명품 핸드백의 아시아 생산을 처음 시작한 인물이다.

 

‘매스티지(대중(mass)+명품(prestige product)의 합성어) 시대를 연 실질적인 주인공’ ‘명품 가방 업계의 숨은 실력자’ ‘세계 최고의 핸드백 전문가’…. 박은관 시몬느 회장을 설명하는 다양한 수식어들이다.

마이클코어스, 마크제이콥스, 지방시, 버버리, 로에베, 셀린느, 토리버치, DKNY, 코치, 쥬시꾸뛰르, 케이트스페이드, 폴로 등의 공통점은? ‘명품 브랜드’라고 얘기하면 명품을 좀 아는 사람이다. ‘시몬느에서 만드는 명품 브랜드’라고 하면 명품 전문가 반열에 들 만하다. 이들 브랜드 제품을 모두 박은관 시몬느 회장(56)이 OEM 생산한다.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의 시몬느 공장에서 만들어진 이 가방들은 전량 미국과 유럽으로 들어가 해당 브랜드 라벨을 달고 다시 전 세계로 수출된다.

시몬느가 올해 가방 OEM 제조, 수출로만 벌어들일 것으로 기대하는 돈이 무려 4억1000만달러(4500억원가량)다. 시몬느의 직접적인 가방 수출 매출액은 4500억원이지만, 시몬느 가방이 새로운 라벨을 달고 나가 실제로 판매되는 금액은 그 10배가 넘는 5조원에 달한다. 2010년 기준 전 세계 명품 시장 규모는 240조원대로 추정된다. 그중 핸드백 시장은 50조원 정도. 시몬느 가방 판매액이 5조원이라면 전 세계 명품 핸드백 시장의 10%를 시몬느에서 공급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박 회장이 1987년 설립한 조그마한 핸드백회사 시몬느의 현재 모습은 ‘명품 핸드백 최고 OEM 업체’다.

아버지는 인천에서 수산업과 냉동공장, 어망공장, 객주 등을 운영하던 거상이었다. ‘황해수산’ 하면 당시 인근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4남 2녀 중 셋째 아들인 박 회장은 연세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청산’이라는 핸드백 제조업체에 취업한다. 다른 아들 셋은 모두 아버지 회사에 입사했다. 박 회장만 “3년만 다른 회사에서 일을 배우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업종도 상관없이 그저 수출회사에 가고 싶었다. 수출회사에 들어가면 더 큰 세상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마침 과사무실에서 ‘청산’ 입사지원서를 발견하고 ‘수출기업’이라는 한마디에 무작정 청산으로 찾아갔다. 1979년 청산 직원이 됐다. 당시 청산은 가방만 450만달러어치를 수출하던 가방수출전문업체였고, 박 대표는 청산이 선발한 대졸 공채 1기였다.

전 세계 명품 핸드백 시장 10% 차지

박 회장이 지금도 인생의 멘토로 모시고 있다는 정홍덕 청산 회장은 사람을 키우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영업을 제대로 하려면 시장을 알아야 한다며 신입사원인 박 회장을 유럽에 출장 보냈다. 1980년대 초 국외 여행이 아직 자유화되지 않았을 때라 외국에 나가본 사람이 거의 없는 시절이었다. 처음 이탈리아에 가본 박 회장은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에 빠졌다.

“바지 색깔이 무지갯빛이었어요. 초록색 바지, 보라색 바지, 빨간색 바지, 노란색 바지를 입은 남자를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이탈리아에 가니 그런 남자 천지인 거예요. 이름만 들어봤던 베네통 매장에 가보니 티셔츠 컬러가 무려 18가지나 되더라고요. 라임, 오렌지 등 들어보지도 못한 컬러도 많았어요. 가진 돈을 몽땅 털어 18가지 컬러 셔츠를 모두 사왔습니다. 그렇게 패션의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처음엔 3년만 하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결국 7년을 했습니다.”

재미있어서 일하는 사람을 당할 수는 없는 법. 영업사원으로 입사해 1년 만에 대리, 다시 6개월 만에 과장, 그 다음 1년 후 차장, 그리고 29세에 부장이 됐다. 워낙 성장하던 산업군이라 초고속 승진이 가능했던 측면도 있지만 그만큼 박 회장이 올린 실적이 놀라웠다. 박 회장이 청산에 입사하던 시절만 해도 한국에 ‘가방수출전문업체’ 타이틀을 단 곳은 400여개에 육박했다. 청산은 그중 하나의 회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박 회장이 청산을 그만두던 1986년 청산은 수출액 8000만달러 기록을 세우며 1등 가방수출전문업체로 발돋움했다. 박 회장이 ‘리즈클레이본’이라는 대형 거래처를 개척해낸 덕분이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미국에는 제대로 된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없었다. 유럽은 ‘Made in Europe’ 외에는 취급을 안 했다. 한국산 가방을 수출하면 대부분이 미국 저가 백화점에서 기획상품으로 팔려나가거나 현지 브랜드 가방을 주로 파는 가방가게 한편을 장식하는 수준이었다. 그때 ‘리즈클레이본’이라는 미국 패션 브랜드가 막 생겨났는데 박 회장이 리즈클레이본 OEM 계약을 따낸 덕분에 청산 매출그래프가 급성장곡선을 그릴 수 있었다. 리즈클레이본은 처음엔 이탈리아에 OEM 제작을 맡겼다. 그러나 단가가 안 맞아 곧 그만뒀다. 다음엔 남미에 맡겼는데 정정이 불안한 남미에서 안정적인 공급을 받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같이 일해보자’며 나타난 한국 업체가 리즈클레이본엔 딱이었다.

1986년 ‘에스프리’라는 신생 미국 브랜드가 생겼다. 에스프리는 리즈클레이본 OEM 제작을 하고 있는 청산에 자기네 가방도 제작해달라고 요청했다. 1986년 에스프리 브랜드 가방을 출시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20~30대 대상 리즈클레이본과 10대 후반~20대 초반이 타깃인 에스프리는 핵심 고객층이 겹치지 않는 만큼 함께 만들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리즈클레이본 측에서 당장 에스프리 가방 제작을 그만두지 않으면 거래선을 바꾸겠다고 통보해왔다. 8000만달러 수출액의 70% 이상을 리즈클레이본에서 올리던 청산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힘든 요구였다.

어쩔 수 없이 에스프리 제작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에스프리 사장은 “그러지 말고 박, 자네가 직접 가방회사를 하나 만들어보는 건 어때?”라고 제안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가방회사 창업의 길은 그렇게 시작됐다.

“창업을 하겠다”고 하자 정홍덕 회장은 “창업을 하려면 실력, 자금, 타이밍이 중요하다. 실력과 자금은 믿는다. 문제는 타이밍인데 솔직히 지금이 타이밍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겠다면 꼭 필요한 사람 몇 명을 함께 데리고 나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비서, 기사, 자재 담당자, 패턴사, 영업사원 2명 등 총 6명을 데리고 나왔다(워낙 중역급으로 일을 하다 보니 박 회장은 과장 시절부터 비서와 기사가 있었다).

정홍덕 회장이 “타이밍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박은관 회장이 창업을 하겠다던 시절은 1987년. 당시만 해도 “이제 제조업 시대는 지났다. 특히 봉제업 등 노동집약적 제조업은 완전 끝났다. 제조업을 하려거든 중후장대 제조업을 하거나 아니면 서비스업으로 갈아타야 한다”는 게 한국 사회를 감쌌던 분위기다. 심지어 “아직도 제조업을 하십니까”라는 말이 농담처럼 떠돌았다. 가방수출업체를 창업하겠다고 하자 부친을 비롯해 모두가 말렸다. “그동안은 많은 재미를 봤겠지만 이제 끝물이다. 막차 타서 무얼 하겠냐”는 논리였다. 특히 부친은 “괜한 짓 하지 말고 이제 내 밑으로 들어와라. 3년이 아니고 무려 7년을 기다려줬다”며 강하게 권유했다. 그러나 박 회장은 생각이 달랐다.

끝물 봉제업에서 ‘기회 있다’ 판단

“회사 생활을 하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패션을 하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얘기가 ‘미국 브랜드를 잘만 잡으면 향후 큰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의류 브랜드로 시작해 세계 패션업계에 조금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미국 브랜드가 조만간 토털 브랜드로 성장할 텐데 그 시장은 한국 업체들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란 얘기였지요. 싸구려 OEM 봉제업 시대는 끝났지만 고가 디자이너 브랜드 OEM 봉제업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과연 내가 그 시장을 뚫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더 컸어요. 없던 시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니만큼 리스크도 크겠지만 반대로 기회도 훨씬 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회사 생활하며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창업자금 3000만원으로 ‘시몬느’를 설립했다. 회사를 세우고 처음 찾아간 곳이 당시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패션 브랜드였던 ‘DKNY’다. 각국 영부인들이 디자이너 도나 카란의 옷과 액세서리를 애용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DKNY는 미국 백화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 반열에 올랐다.

“미국 백화점에 가서 도나 카란 브랜드 가방을 7개 샀습니다. 이탈리아에 가서 같은 가죽과 원부자재를 구입해 똑같이 만들었지요. 제가 만든 가방을 가져가 DKNY 바이어들을 만났습니다. ‘이게 내가 만든 가방이다. 당신네 가방과 똑같은 가방을 난 30~40% 저렴한 가격에 만들어줄 수 있다. 내게 일을 맡겨달라’고 했지요. 바이어들이 흥분하면서 ‘위에 보고할 테니 내일 다시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계속 깜깜무소식인 거예요.”

▶ 시몬느는 어떤 회사?
·1987년 설립
·1988년 수출의날 500만달러 탑 수상
·1989년 수출의날 1000만달러 탑 수상
·1992년 중국 광저우 공장 설립
·1996년 수출의날 5000만달러 탑 수상
·1999년 인도네시아 공장 설립
·2000년 무역의날 수출 1억달러 탑 수상
·2008년 베트남 호찌민 공장 설립
·2010년 3억5000만달러 수출
·시몬느가 OEM 생산하는 주요 브랜드 : 마이클코어스, 마크제이콥스, 버버리, CK, 지방시, 로에베, DKNY, 셀린느 등 30여개 글로벌 브랜드 핸드백 생산

`다음 호에 계속`

[김소연 기자 sky6592@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