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경비’ 주민투표 바람…몸낮춘 경비원들 ‘해고 조바심’

2011. 9. 2. 08:42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무인경비’ 주민투표 바람…몸낮춘 경비원들 ‘해고 조바심’

한겨레 | 입력 2011.09.01 20:50 | 수정 2011.09.01 23:20 |

 

[한겨레] 아파트마다 "CCTV 등 확대"


보안업체는 공짜 마케팅


쓰레기 분리 자처·머리 염색


"주민에 잘보이자" 인정 호소

"아이고, 제가 하겠습니다. 이리 주세요." 한 주민이 아파트 주차장에 마련된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폐지와 빈 페트병을 한아름 들고 와 분류하려고 하자 경비원이 냉큼 달려나온다.

"이제 오시는 거예요." 젊은 남성 입주민이 늦게 퇴근해서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나이가 지긋한 경비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한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삼풍아파트에서는 요즘 경비원들의 근무 자세가 달라졌다. 9월에 있을 주민투표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풍아파트는 9월26일부터 30일까지 전체 2390가구를 대상으로 '통합경비시스템' 도입 여부를 결정하는 주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투표 결과 주민들의 찬성이 많으면,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14억6900만원을 들여 카드로만 열리는 현관문과 감시카메라 등 보안시설을 설치하고, 경비원 100명 가운데 3분의 2인 64명을 해고할 계획이다.

관리사무소는 통합경비시스템을 도입할 경우, 단지 전체로는 해마다 15억3600만원, 가구별로는 평수에 따라 매년 100만~123만원가량 관리비가 줄어든다는 내용을 담은 홍보자료를 지난 6월 주민들에게 배포했다.

삼풍아파트가 통합경비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이유는 내년부터 경비원의 월급을 26% 올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경비원과 같은 '감시·단속직 노동자'에게는 최저임금의 80%만 지급해도 되는 최저임금법 특례적용기간이 올해 말로 끝나, 내년부터는 이들 노동자에게도 최저임금 100% 지급 규정이 적용된다. 여기에 더해 내년 최저임금 인상분 6%까지 반영하면, 경비원의 내년 월급은 26% 인상된다. 관리사무소 쪽은 월급과 퇴직금, 보험료 등을 합쳐 경비원 한명에게 들어가는 인건비가 현재 150만원에서 내년에는 200만원으로 뛴다고 설명했다.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게 되자 경비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 촉탁직인 경비원 이아무개(63)씨는 나이 많은 사람부터 자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얼마 전 머리를 염색했다. 경비원 정년은 61살이지만, 보통 촉탁직으로 64살까지 3년 동안 더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대신 촉탁직 경비원의 고용계약서에는 구조조정 때 가장 먼저 해고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김씨는 "경비원끼리는 투표 때까지라도 성실하게 일해서 주민들한테 잘 보이자고 얘기한다"며 동료들 사이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사업에 실패한 뒤 할 수 있는 일이 경비원밖에 없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이 일까지 빼앗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씁쓸해했다.

경비원의 임금이 오르는 것을 계기로 경비원을 줄이고 통합경비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은 삼풍아파트만의 일이 아니다. 서울 중구 롯데캐슬베네치아아파트에서도 지난달 초 통합경비시스템을 들이고 경비원을 27명에서 18명으로 줄이기로 하고 용역업체 선정까지 마쳤다.

아파트 주민회가 적극적으로 통합경비시스템을 추진하는 데는 경비보안업체의 공격적인 마케팅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경비보안업체 매출이 18%가량 늘었다. 한국경비협회 권해득 사무국장은 "통합경비시스템을 도입해서 줄어든 경비원의 인건비 2~3년치만 자신들에게 주면 그 뒤엔 통합경비시스템을 공짜로 사용하게 해주겠다는 식으로 경비보안업체가 아파트 입주민 대표들에게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