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슨은 달걀을 품었고 나는 부화기를 만든다

2011. 9. 25. 18:39분야별 성공 스토리

[O2/커버스토리]에디슨은 달걀을 품었고 나는 부화기를 만든다

■ 서울서 전북 장수로 ‘귀농’한 고2 박병천 군

동아일보 | 입력 2011.09.24 03:05 | 수정 2011.09.24 15:37

 

자신이 직접 부화시켜 키운 오계를 높이 치켜든 산골소년 박병천 군.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생태공원을 만들겠다는 당찬 꿈을 밝혔다. 장수=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2007년 어느 여름날. 할머니 댁에서 가져온 암탉이 왠지 수상쩍었다. 푸드득 푸드득 정신없이 닭장을 헤매던 놈이 오늘은 미동조차 없다니. 아니나 다를까. 암탉이 배 아래로 숨긴 노르스름한 달걀 2개가 소년의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두 발 달린 쟤도 하는데 두 손까지 있는 난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무조건 호기심을 보이던 소년에겐 꽤 재미난 도전과제였다. 호기심 때문에 직접 알을 품었던 꼬마 에디슨보다 적어도 몇 살이나 형이지 않은가. 접근하는 방법부터가 달라야 했다. 우선 '알을 부화시키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책과 인터넷을 닥치는 대로 뒤졌다. 두 달여 만에 부화에 관한 이론에는 웬만큼 자신이 생겼다. 부화기는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서 동생들과 나눠 먹고선 포장상자 안에 백열전구를 달았다. 어미닭에게서 달걀 3개를 훔쳐 부화기에 넣었다. 백열전구를 켰다 껐다를 반복하고, 아이스크림 상자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적정온도(37.5도)를 맞췄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지만 결과는 실패. 여기서 낙담할 소년이 아니었다. 문제점을 보완해 부화기 2, 3, 4호를 만들었고, 부화기간(21일) 동안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럼에도 실패는 계속됐다.

어느덧 해가 바뀌어 2008년, 따뜻한 봄날이었나 보다. 병아리 3마리가 처음 알을 깨고 나온 건 말이다. 어미닭 대신 소년의 인공부화기가 탄생시킨 첫 생명이었다. 그 순간의 희열은 소년이 이후 평생 간직할 만큼 강렬했다. 소년은 그때 깨달았다. '아, 이게 내가 할 일이구나.'

'병아리 키우는 산골소년' 박병천 군(17·장수고 2학년)에게는 꿈이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생태공원을 만들겠다는 결코 작지 않은 꿈이다. 병천 군은 "우선 검은색 오계(烏鷄)와 토종닭을 1만 마리까지 늘리는 게 첫째 목표"라며 당찬 포부를 밝힌다. 이 친구, 나이답지 않게 스케일이 참 크다.

심마니 가족의 귀농

서울 성동구에서 살던 병천이네는 6년 전 아버지 박동흥 씨(43)의 고향인 전북 장수군으로 귀농했다. 병천 군이 초등학교 5학년, 병호 병우 두 동생은 만 여섯 살, 네 살 때였다. 서울 토박이인 어머니 나영자 씨(40)는 삼형제의 교육 걱정에 귀농을 반대했다. 적어도 큰아들이 초등학교는 졸업한 뒤에 귀농을 하자고 남편을 어르고 달랬다. 하지만 한 번 마음을 굳힌 박 씨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론 이 결정으로 병천 군은 '인생의 꿈'을 더 일찍 꾸게 됐다.

박 씨의 직업은 심마니. 산이 좋아 산악회를 따라다니다 '산도 타고 삼도 캐오면 일석이조겠다'는 생각에 2년간 책을 팠다. 1990년쯤이던가. 강원 홍천군에 처음 더덕을 캐러 갔다가 발견한 작은 삼 세 뿌리가 그의 첫 수확물이었다. 이후에는 거침이 없었다.

"산에 가기만 하면 삼이 보이는 거라. 10군데 가면 8군데선 삼을 캤죠잉."

그는 산삼을 주로 중간상인에게 넘겼는데, 그 삼이 소비자에게 최고 5600만 원에 팔리기도 했단다. 병천 군도 "아빠를 따라다니면 삼이 졸졸 따라온다"고 증언(?)했다.

삼을 캐러 전국을 떠돌다 보니 자연스레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았다. 한 번 산에 들어가면 일주일, 이주일은 예사였고, 달포 만에 집에 돌아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삼형제를 키우는 건 온전히 나 씨 몫이었다. 박 씨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쪼께 그런 면이 좀 있지라. 집사람이 고생 많이 혔지"라며 멋쩍어했다.  

▼ "부화기 100여대 제작 실험… 닭 1만마리 주인 돼야죠" ▼





박병천 군이 직접 만든 대형 자동부화기에서 부화 중인 알을 꺼내 보이고 있다. 한 번에 최대 600∼700개의 알을 부화시킬 수 있는 이 부화기는 박 군의 '100번째쯤' 작품이다. 올해 5월 업소용 냉장고와 두부판 등을 재활용해 만들었다. 아래 왼쪽 사진은 박 군이 지난해 스티로폼 통으로 만들었던 12란 부화기이고, 오른쪽은 올 4월 아이스박스로 만든 100란 부화기다.

"바깥양반이 산삼을 곧잘 캐왔지만 처음엔 관두라고 말렸어요.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고. 흐흐흐. 그래도 병천이 쟈가 동생들한테 형 노릇, 아빠 노릇을 다 해주니께 제가 그나마 견뎠죠잉."

서울 토박이인 나 씨도 귀농 6년 만에 사투리가 입에 뱄다. 처음엔 재미로 따라하곤 했는데 어느새 사투리가 입에 착착 감기더란다. 이웃에선 '토박이보다 더 시골스러운 서울 아지매'라 불릴 정도다.

박 씨는 왜 귀농을 결심했을까. 대답은 다소 싱거웠다.

"시골에서 사는 게 꿈이였지라. 또 내가 약초를 항게, 건강에도 관심이 많고. 한 번은 전 가족이 여기 장수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한 달을 머문 적이 있어라. 다시 서울로 가서 올림픽대로에 막 들어서는데 타이어 냄새, 먼지 찌든 냄새가 어찌나 나던지. 그때 결심했어라. 시골 가서 살기로. 집사람은 시골 살 체질이 아닌데 내가 엄청 꼬셨죠잉."

○ 병아리에 꽂힌 큰아들

박 씨는 가족 전체가 귀농하기 1년여 전 장수군 천천면 인근 임야 3만 평을 빌려 장뇌삼(사람이 키운 산삼) 재배 사업을 시작했다. 귀농 후 형편이 조금 나아진 지난해 봄에는 땅 3700여 m²(약 1100평)를 사서 기장과 콩을 심었다. 아예 농사꾼으로 전업을 시도한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자신이야 괜찮지만, 아내와 어린 세 아들에게는 귀농이라는 쉽지 않은 선택을 강요한 게 아닌가. 그는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조금이나마 빚을 갚는 길이라 여겼다. 요즘도 가끔은 삼을 캐러 다니지만 하루 일정으로 가까운 지리산에 다녀오는 게 대부분이다.

"어릴 적 부모님 농사일을 거든 적은 있어도 직접 농사를 짓기는 저도 처음이지라. 그래도 콩은 손이 덜 가니께 나름대로 할 만혀요."

초보 농사꾼은 이렇게 말하고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부모님 댁에서 키우던 닭 서너 마리를 가져온 것은 시골생활을 낯설어하는 아이들에게 소일거리라도 주고픈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큰아들 병천 군이 그만 병아리에 꽂히게 됐다.

병천이는 손재주가 좋은 아이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뚝딱뚝딱 만들어내곤 했다.

"병천이가 날 닮아서 그런지 손재주가 좋아요잉. 뭘 하기만 하면 참 잘하니께."(박 씨)

병천 군이 스스로 만든 부화기도 점차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춰 나갔다. 처음엔 아이스크림 상자로 만들었던 부화기가 조금 더 큰 스티로폼 통으로, 또 근처 상가에서 얻어온 아이스박스로 진화를 거듭했다. 급기야 올봄에는 전북 전주시의 한 고물상에서 3만 원을 주고 업소용 냉장고를 사 왔다. 이 냉장고에 온도조절용 센서와 환기용 팬, 백열전구 등을 설치했다. 두부판을 엮어 만든 전란(轉卵·알 굴리기) 틀에 자동모터까지 달아 하루 8번 알을 굴려주는 '대형 자동부화기'를 완성했다. 만드는 데만 2주일이 걸렸다. 스스로도 대견스러울 만했다.

"아마 이 냉장고 부화기는 제가 만든 100번째쯤 작품일 거예요. 한꺼번에 최대 600∼700개는 거뜬히 부화시킬 수 있죠."(병천 군)

병천 군은 올 들어서만 오계와 토종닭을 1000마리 이상 부화시켰다. 한 마리에 5000원을 받고 분양했으니 이미 500만 원 이상의 소득을 올린 셈이다. 병천 군은 "태어나서 한 번도 돈을 찾아본 적이 없다"며 통장에 얼마나 돈이 쌓였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애초부터 돈을 목적으로 분양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웃에 사는 분들이나 블로그(blog.naver.com/minna55)를 통해 병아리를 부탁한 분들에게 한 마리, 한 마리 분양하다 보니 끝도 없더라고요. 지난달부터는 분양을 안 하고 있는데, 지금도 병아리 부탁하는 전화가 하루에도 몇 통씩 와요."

○ 시련, 그리고 꿈





박병천 군 집에서 가꾸는 콩밭에서 포즈를 취한 가족.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아버지 박동흥 씨, 어머니 나영자 씨, 그리고 삼형제인 병천 병호 병우 군이다. 나 씨는 "안 그래도 가족사진 한 장 없는데 잘됐다"며 좋아했다. 옛날 돈 같은 골동품을 보면 무조건 모은다는 둘째 병호 군은 커서 고고학자가 되는 게 꿈이다. '닌자'가 되겠다는 막내 병우 군은 집 근처에 아이스크림가게가 없는 게 불만이지만 더는 '서울로 다시 가자'고 떼를 쓰지 않는다. 장수=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병천 군은 현재 오계와 토종닭을 70여 마리씩 키우고 있고, 갓 태어난 병아리도 50마리가 넘는다. 하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면 '기적'이란 생각밖에 안 든다.

지난해 여름 병천 군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닭장은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깃털은 사방에 흩어져 있고, 목이 물린 채 죽은 닭들은 보기에도 흉측할 정도였다. 박 씨가 키우는 카이홋하운드 종의 사냥개 '곰'이 목 끈을 풀고 저지른 만행이었다. 칠면조 8마리와 토종닭 40∼50마리가 한 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건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토종닭 3마리뿐이었다.

"황당했죠. 아무 말도 안 나왔어요. 저리도 순한 곰이가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전날인가, 전전날인가 알들을 미리 부화기로 옮겨놓지 않았다면 아마 그때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누군가가 카이홋하운드를 '사랑스러운 연인과 광적인 살육자라는 두 얼굴을 가진 개'라 부른 이유를 알 만했다. 병천 군은 당시의 광경을 기억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또 한 번 닭들이 희생됐다. 이번에는 태어난 지 두 달여밖에 안 된 어린 닭들이었다. 곰이가 밉지 않았느냐고 하자 병천 군이 또 한번 나이답지 않은 대답을 내놓는다.

"제가 동물을 좋아해서 그런지, 얘(곰)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싶더라고요. 닭들에겐 미안했지만…. 그 후론 곰이 목 끈을 더 단단히 조이고, 닭장의 철망도 더 튼튼하게 만들었어요. 그러고는 아직까지 별다른 사고는 없었고요."

사실 병천 군은 곰이가 주인 가족들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그런 짓을 벌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곰이는 한겨울이 되면 집 근처 야산으로 내려오는 들짐승을 물어다놓곤 한다. 크진 않지만 멧돼지를 물어온 적도 있다. 그때마다 칭찬을 들었으니 집짐승도 잡아도 되는 줄 알았을 수 있었으리라.

우여곡절 끝에 닭들을 키워내면서 병천 군은 최근 '닭 1만 마리'라는 확실한 목표를 세웠다. 8월부터 병아리 분양을 중단한 것도 규모를 늘리기 위해서란다. 대량 부화를 위해 곧 컨테이너 하나를 구해 부화기로 개조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냥 내뱉는 허풍 같진 않다.

병천 군이 그리는 미래에 닭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의 닭장에는 이미 꿩 3마리, 원앙 4마리, 청둥오리 5마리, 기러기 2마리 등 다양한 식구가 있다. 집안엔 지네,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귀뚜라미 등을 키우고, 하얀 앵두 같은 희귀식물도 앞마당에 심어놓았다.

"전 동물뿐 아니라 곤충이나 식물에도 관심이 많아요. 나중에는 최고의 생태공원을 만들고 싶어요."

박 씨도 이런 아들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우선 장뇌삼 밭 인근 야산에 35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지은 뒤 병천 군이 키우는 닭들을 모두 옮겨갈 예정이다. 내년쯤 가족이 살 황토집을 새로 짓고 나면, 그 옆 한쪽 땅을 병천 군에게 맡겨 식물이건 곤충이건 마음껏 키우게끔 할 생각이다.

"내가 말을 시켜본게 우리 병천이가 여러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다행히 아는 분 중에 희귀 종자 같은 걸 갖고 있는 분이 있어서 병천이가 한 번 키워보게 해 줄라고요."

병천 군은 또래의 도시 학생들과 달리 학원은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공부는 원래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대학은 꼭 갈 계획이다. 경기 화성시에 있는 농수산대학교 가축학과가 목표다. 대학에서 자신의 관심분야를 제대로 공부한 뒤 꿈을 실현하는 데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23일 소년의 블로그 '병처니's story'에는 'D+2028, 도시를 떠나고 시골과 함께 한 날!'이라고 쓰여 있다. 그가 시골에서의 삶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글귀다. 누군가가 "형, 나중에 사슴 타고 다니고 그러는 것 아녀∼∼ 길들여서 ㅎㅎ"라는 글을 남기자 소년은 "나는 새 타고 날아다닐 거야"라는 답변을 남겼다. 왠지 진짜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깊어가는 가을 밤, 산골소년의 당찬 꿈도 차츰차츰 영글어가고 있었다.

장수=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