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소시엄 구성이 화근, 수익배분 '모르쇠' 일관

2012. 1. 3. 08:52이슈 뉴스스크랩

3. 정글의 법칙과 약자 보호, 어느 것이 공정할까

땅을 치는 중기 대표
컨소시엄 구성이 화근, 수익배분 '모르쇠' 일관
직원도 빼가 고사직전… "우린 루저일뿐" 자조만


20년 장사 접는 골목 상인
인근에 SSM 등장이후 용돈벌이조차 허덕
"똑같은 조건이라고 경쟁 내모는 건 무책임"


"발 한번 잘못 디뎠다가 늪에 빠진 기분입니다."

공간정보통신 전문기업 A사의 김모 대표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15년 전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지리정보시스템(GIS) 분야에 뛰어들어 난공불락 같던 외국 제품의 벽을 뛰어넘는 데에 청춘을 바쳤던 그는 "대기업의 횡포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김 대표는 벤처업계에선 꽤 유명인사다. 국내 GIS 분야 개척자인 그는 구글어스보다 7년 앞서 세계 최초로 웹3D GIS를 개발했다. 도로명주소 데이터베이스, 서울시 GIS포털, 국가지리유통망 등 대부분의 국내 GIS 관련 공공서비스는 이 회사의 기술로 탄생했다.

승승장구하던 김 대표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지난해 초. 정부의 도로명주소 정보화사업에 참여하면서 대기업 B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좀 더 쉽게 가자는 생각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수주에 성공하자마자 B사는 수익의 70%를 주겠다며 써준 확인서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고 업계 관행에 따른 중도금 지급도 거부했다. 게다가 작년 9월 갑작스레 막대한 사업비용까지 청구했다.

이 때문에 A사는 급여조차 제 때 지급하지 못하면서 100명이 훨씬 넘던 직원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그런데 이직한 직원들 대다수가 B사와 우호관계에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업계 관계자는 "전형적인 중소기업 죽이기 사례"라며 "대기업들이 유망한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을 흔들어 싸게 인수하거나 인력을 빼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00년대 초 음악파일이라는 새로운 흐름에 주목해 MP3 플레이어 종주국 신화를 일궈냈던 중소기업들 역시 지금은 상당수가 문을 닫은 상태다. 한 때 세계시장을 제패했던 아이리버조차 명맥

정도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업계 관계자는 "많은 사람들이 애플 아이팟과 경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이들 중소기업에게 직격탄을 날린 건 국내 대기업 C사였다"고 했다. 초반에 시장성이 없다며 한발 물러서 있던 C사가 중소기업들의 성공을 보고 뒤늦게 뛰어들었는데 품질 경쟁보다는 저가공세와 자사 전자제품 구매시 끼워팔기 등 시장장악에만 열을 올렸다는 것. 이 관계자는 "막대한 자금력과 판매망을 가진 대기업이 출혈을 감수하고 덤비면 어떤 중소기업이 견딜 수 있겠느냐"면서 "그 때 우리들끼리 만나면 서로를 '루저'(패배자)라고 불렀다"고 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08년 55%였던 10대그룹 계열사의 경제력 집중도는 2010년에 75.6%까지 급증했다. 중소기업의 설 자리는 그만큼 줄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같은 변화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정한 룰 속에서 경쟁한 결과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우리의 시장 현실에선 자금력과 조직력을 앞세운 대기업의 일방통행이 작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기업 계열 대형 유통업체들의 횡포에 휘둘리는 영세 자영업자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서울 관악구 성현동 봉오시장에서 20년째 채소가게를 운영해온 백모(58)씨는 지난해 말 결국 가게 문을 닫기로 했다. 백씨는 "3년 전 길 건너편 상가건물 건너 지하에 대형 슈퍼마켓(SSM)이 들어섰을 때부터는 그냥 용돈벌이 하는 수준이었다"면서 "처음에는 몇몇 채소만 팔더니 작년부터는 이것저것 다 팔기 시작하고 틈만 나면 할인행사를 해대는 통해 이젠 단골손님들의 발길도 거의 끊겼다"고 했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서 176㎡(약 55평) 규모의 슈퍼마켓을 운영중인 한모(43)씨는 "재작년부터 주변에 SSM이 차례로 세 개나 들어서면서 매출이 30%로 줄었다"면서 "대기업이 운영하는 SSM이랑 우리 같은 자영업자를 똑같은 조건이니 알아서 경쟁하라고 내모는 건 무책임한 일"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지난 4년간 전국 재래시장의 매출액은 총 9조3,000억원이 감소한 반면 대형마트의 매출은 9조4,000억원이 늘었다. 재래시장에서 줄어든 매출이 고스란히 대형마트로 갔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