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닦이서 매출 3천억대 중견기업 일군 박주봉 케이씨 회장
2012. 1. 30. 09:15ㆍ분야별 성공 스토리
구두닦이서 매출 3천억대 중견기업 일군 박주봉 케이씨 회장
강한 中企 키우는 비법 청년들에게 전수하고파 | |
기사입력 2012.01.26 17:17:36 | 최종수정 2012.01.27 09:41:32 |
"중소기업이 강한 나라에서 후배들이 일하게 하고 싶어요."
구두닦이부터 시작해 매출 3000억원대 중견기업을 일군 박주봉 케이씨 회장(55)은 "기업하면서 시련이 너무 많았다. 이런 고통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24년간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가슴속에 묻어둔 소망은 이런 것이었다.
전남 장흥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부친이 서울로 올라와 사업에 실패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중1 때부터 혼자 살았다. 구두닦이부터 평화시장 보따리장수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런 그가 `기업가`를 꿈꾼 동기는 너무나 단순했다.
"고등학교 때 선배 집을 찾았다가 한 바구니 가득 담겨 있던 귤을 봤습니다. 그때 처음 귤을 먹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나 싶었지요. 그 선배 아버님은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장 나도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군에서 제대한 후 인천의 한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1년3개월 정도 일해 꼬박 모은 월급과 퇴직금을 종잣돈으로 삼아 사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돈을 8t짜리 트럭 한 대를 사는 데 몽땅 쏟아부었다.
첫 사업은 부두에서 석탄을 나르는 일이었다. 새벽 4시부터 시작해 자정 무렵에야 일을 마쳤다. 성실함에다 신용도 쌓여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1대였던 트럭이 2대가 되고, 다시 4대로, 8대로 불었다.
1990년대 들어 인천제철(현재 현대제철) 협력업체로 등록되면서 사업은 본격적으로 커져 갔다. 정주영 회장 시절 현대그룹 3000여 협력사 중 최우수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외환위기 후 공기업 민영화 1호인 한국종합화학을 인수했다. 주위에서는 `미친 짓`이라고 했다. 한국종합화학(현재 케이씨)은 비누, 치약 등 생활필수품의 원료를 생산하는 국내 유일의 화학회사였지만 한해 200억원씩 적자가 나던 부실투성이였다.
기업가로서 제2 삶을 내디딘 그는 인수 후 문제점을 하나하나 고쳐 갔다. 강도 높은 인력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노조가 반발하자 직접 노조 집행부를 이끌고 독일과 일본 경쟁 회사를 방문해 현실을 직시하도록 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정년 퇴직한 전문 기술자를 초빙해 기술개발에도 적극 나섰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회사는 2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인수 당시 500여 명이던 임직원 수는 현재 200여 명으로 줄었지만 매출은 200억원에서 2000억원대로 10배나 커졌다.
철강 물류 업체인 동화개발과 광업진흥공사, 포스코 등과 합자해 세운 화학 자회사 매출을 합치면 이제 박 회장의 사업체는 연간 매출 3000억원대를 웃돈다.
"초등학교 이후 계속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한 인생입니다.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일만 했습니다. 지금도 6시에는 꼭 출근을 합니다. 그런데 날로 심각해지는 청년실업 문제를 보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젊은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네요."
그는 다음달 7일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국회 지식경제위원장과 함께 `중소기업발전 국제회의` 세미나를 연다. 독일 일본 대만 등 중소기업 선진국 전문가들을 자비로 초청해 강한 중소기업의 비결을 찾는다.
박 회장은 "대기업과 거래하기 위해 손해를 보면서도 일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절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면서도 "젊은이들도 어려움이 닥치면 포기하고 좌절하는 나약함은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용성 기자 / 사진 = 김재훈 기자]
구두닦이부터 시작해 매출 3000억원대 중견기업을 일군 박주봉 케이씨 회장(55)은 "기업하면서 시련이 너무 많았다. 이런 고통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24년간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가슴속에 묻어둔 소망은 이런 것이었다.
전남 장흥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부친이 서울로 올라와 사업에 실패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중1 때부터 혼자 살았다. 구두닦이부터 평화시장 보따리장수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런 그가 `기업가`를 꿈꾼 동기는 너무나 단순했다.
"고등학교 때 선배 집을 찾았다가 한 바구니 가득 담겨 있던 귤을 봤습니다. 그때 처음 귤을 먹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나 싶었지요. 그 선배 아버님은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장 나도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군에서 제대한 후 인천의 한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1년3개월 정도 일해 꼬박 모은 월급과 퇴직금을 종잣돈으로 삼아 사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돈을 8t짜리 트럭 한 대를 사는 데 몽땅 쏟아부었다.
첫 사업은 부두에서 석탄을 나르는 일이었다. 새벽 4시부터 시작해 자정 무렵에야 일을 마쳤다. 성실함에다 신용도 쌓여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1대였던 트럭이 2대가 되고, 다시 4대로, 8대로 불었다.
1990년대 들어 인천제철(현재 현대제철) 협력업체로 등록되면서 사업은 본격적으로 커져 갔다. 정주영 회장 시절 현대그룹 3000여 협력사 중 최우수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외환위기 후 공기업 민영화 1호인 한국종합화학을 인수했다. 주위에서는 `미친 짓`이라고 했다. 한국종합화학(현재 케이씨)은 비누, 치약 등 생활필수품의 원료를 생산하는 국내 유일의 화학회사였지만 한해 200억원씩 적자가 나던 부실투성이였다.
기업가로서 제2 삶을 내디딘 그는 인수 후 문제점을 하나하나 고쳐 갔다. 강도 높은 인력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노조가 반발하자 직접 노조 집행부를 이끌고 독일과 일본 경쟁 회사를 방문해 현실을 직시하도록 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정년 퇴직한 전문 기술자를 초빙해 기술개발에도 적극 나섰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회사는 2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인수 당시 500여 명이던 임직원 수는 현재 200여 명으로 줄었지만 매출은 200억원에서 2000억원대로 10배나 커졌다.
철강 물류 업체인 동화개발과 광업진흥공사, 포스코 등과 합자해 세운 화학 자회사 매출을 합치면 이제 박 회장의 사업체는 연간 매출 3000억원대를 웃돈다.
"초등학교 이후 계속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한 인생입니다.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일만 했습니다. 지금도 6시에는 꼭 출근을 합니다. 그런데 날로 심각해지는 청년실업 문제를 보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젊은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네요."
그는 다음달 7일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국회 지식경제위원장과 함께 `중소기업발전 국제회의` 세미나를 연다. 독일 일본 대만 등 중소기업 선진국 전문가들을 자비로 초청해 강한 중소기업의 비결을 찾는다.
박 회장은 "대기업과 거래하기 위해 손해를 보면서도 일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절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면서도 "젊은이들도 어려움이 닥치면 포기하고 좌절하는 나약함은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용성 기자 / 사진 = 김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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