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원 벌고도 세금 0원투기자본 위한 지상천국

2012. 6. 17. 09:28이슈 뉴스스크랩

수조원 벌고도 세금 0원투기자본 위한 지상천국

수조원 벌고도 세금 0원투기자본 위한 지상천국

[한겨레] <보물섬>

인구 2만 영국 버진아일랜드
기업 80만개나 등록된 까닭?
투기로 벌어들인 ‘먹튀’ 자본
조세 피하려 ‘역외금융’ 이용

외환은행 인수 매각으로 몇 조원이나 되는 막대한 차액(투자수익률 239%)을 챙긴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를 앞세워 또다시 몇 천억원의 세금을 돌려받겠다고 하는 모양이다. 외환은행 매각 주체가 론스타의 벨기에 법인인 ‘LSF-KEB 홀딩스’이고, 벨기에와 한국은 이중과세 방지협정을 맺고 있어 벨기에 법인이 한국에 투자해 수익을 얻으면 벨기에가 과세권을 갖는다는 게 그 이유다. 벨기에는 해외 주식투자 소득에 세금을 물리지 않는 나라다. 따라서 론스타는 몇 조원 수익을 올렸으면서도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 과정에서 ‘독소조항’ 비판을 받은 투자자-국가 소송제 첫 사건이 되는 셈인데, 국세청이 패소할 수 있다. 온라인 서점 아마존의 영국법인은 지난 3년간 8조56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도 세금 한 푼 내지 않았다.

영국 저널리스트 니컬러스 색슨의 <보물섬>을 읽어 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벨기에는 대표적인 조세회피처 가운데 한 곳이다. 책에서 ‘역외 세계’ ‘역외 체제’라고도 부르는 조세회피처는 “해외에서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금융비밀주의와 조세 혜택 및 여러 법망 회피수단을 고안해서 제공하는 곳”이다. 한마디로 치외법권지대에 가깝다. 서방 거대자본들이 약탈적 방법으로 긁어모은 거액의 자금을 세금 한 푼 안 내고 세탁해서 거래하고 은닉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따라서 론스타의 주장은 부도덕하고 추악한 것일지라도 합법일 수 있다. 약탈해서 숨겨둔 피묻은 보물 찾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도덕적 판단기준이 약간 모호한 활극을 그린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1883)을 제목으로 따 붙인 것은 그럴듯하다.

<보물섬>은 최근 수십년간 발생한 유의미한 대형 경제적·정치적 사건들 배후에는 이 역외금융체제가 똬리를 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미국 워싱턴 국제정책센터의 글로벌금융건전성 프로그램에 따르면, 2006년 한 해에만 개발도상국들이 불법 금융거래로 입은 손실액이 약 8500억~1조달러에 이른다. 이 손실 규모는 해마다 18%씩 커가고 있단다. 이 프로그램을 주도한 레이먼드 베이커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서구인들은 테이블 위로 1달러를 관대하게 던져 주면서 테이블 밑으로는 불법적인 돈 약 10달러를 빼앗아 오고 있다.”

아프리카만 따로 떼어내서 보면, 1970~2008년의 약 40년간 빠져나간 불법적 금융자본 총액이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8540억달러, 많게는 1조8000억달러에 이른다고 국제정책센터는 밝혔다. 1967년 서른두 살에 아프리카 자원 부국 가봉의 대통령이 된 오마르 봉고는 2009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한 세계 최장기 독재자였고, 아들 알리 봉고가 또 대통령이 됐다. 옛 종주국 프랑스는 소수민족 출신으로 지지기반이 약했던 봉고가 권력을 잡자 그의 궁전, 그곳과 지하로 연결된 부대에 수백명의 공수부대원을 배치했다. 프랑스 기업들은 지하자원 개발 독점권을 얻었고 거기서 조성된 거액의 비자금은 자크 시라크의 프랑스 우익 정당 공화국연합의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 사회당도 일정부분 공모했다. 이 신식민주의적 상황을 가봉의 한 저널리스트는 “프랑스 사람들이 앞문으로 떠나더니 도로 옆문으로 들어왔다”고 요약했다. 2007년에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니콜라 사르코지가 제일 먼저 전화한 외국 리더도 봉고였다.

독점적 특혜 대신 봉고의 장기집권을 보장해준 옛 서방 주군들뿐만 아니라 봉고의 가신·측근들 역시 거액을 빼돌렸다. 1%의 그들은 실은 한 패거리다. 2008년에만 약 18조달러나 되는 돈이 네덜란드 ‘역외법인’들을 거쳐 갔는데, 이는 네덜란드 국내총생산(GDP)의 20배나 된다. 이 역외법인들이 바로 조세피난처다.

그러나 오늘날 최대 조세피난처는 네덜란드가 아니라 영국이고 미국이다. 영국 조세 회피지역의 핵은 수도 런던 중심부인 시티 오브 런던과 그 주변부의 금융서비스업계로 구성돼 있다. 이곳에서 전세계 주식거래의 절반, 장외 파생상품 거래의 45%, 글로벌 외환거래의 35%, 국제 주식공모의 55%가 이뤄진다. 미국 뉴욕 맨해튼은 증권화와 보험, 기업 인수합병, 자산관리 등 분야에서 런던보다 규모가 크지만 대부분의 거래가 국내시장 관련이어서 런던이 세계 최대의 국제 금융허브이고 역외금융의 허브, 곧 최대의 조세회피처다. 런던 시티 바로 바깥을 저지·건지·맨과 같은 영국 왕실령 섬들과 케이맨 제도 같은 14곳의 해외영토들이 에워싸고 있고 또 그 바깥에는 홍콩과 싱가포르 등의 옛 식민지 금융허브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 영국 조세피난처 전체 집단이 국제 은행권 총자산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얼마 전 엘리자베스 여왕의 화려한 재위 60년 기념행사 뒤에 서려 있던 대영제국의 어두운 그림자다. 영국 조세회피집단의 최대 이용자는 미국 자본이다. “앞문으로 떠나더니 도로 옆문으로 들어온” 옛 제국주의 종주국의 대표는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이요 미국인 셈이다.

인구 2만5000명도 안 되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는 무려 80만개 넘는 기업이 등록돼 있다. 이용자는 바로 서방 금융투기자본들이다. 파산한 미국 거대 에너지거래 회사 엔론은 881개에 이르는 역외회사를 갖고 있었다. 그중 692개는 케이맨에, 119개는 터크스케이커스에, 43개는 모리셔스에, 나머지 8개는 버뮤다에 있었다. 모두 거미줄처럼 엮인 영국 조세피난처들이다. 시티그룹은 427개, 폭스 뉴스 소유주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은 152개의 자회사를 조세회피처에 두고 있다. 론스타도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은이는 1%를 위한 이런 약탈적 금융기법이 세계경제를 망치고 결국 그 1%마저도 망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조세피난처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보물섬> 얘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현대 금융자본 100년의 이면사가 읽힌다. 이 분야 전문가인 옮긴이 이유영씨에 따르면, 관세청은 지난해 조세피난처로 자체 분류한 국가나 지역으로부터 수입 통관 때 신고된 금액은 모두 429억달러였으나 실제 대금지급 총액은 1317억달러였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그 차액 889억달러, 103조원, 우리나라 정부 연간 예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거금이 어디로 빠져나갔단 말인가.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