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5. 08:41ㆍ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입력 : 2012.10.04 03:04 | 수정 : 2012.10.05 03:48
[잊혀졌던 6·25때 北후방침투요원들 추모식… 생존자 황철수씨의 당시 증언]
낙하산 딱 두번 메보고 실전에… 태종대에 머리카락·손톱 묻고 죽을 각오로 떠나…
계급도 군번도 없이 北후방 교란작전 공세워
'산돼지' 별명의 우리들, 적에겐 공포의 대상이었지
6·25가 한창이던 당시, 북한 후방에 직접 투입된 황씨는 먼저 와 있던 부대원 10여 명과 합류해 침투와 정보 수집 활동을 시작했다. 사방이 적지였기에 대원들은 소규모로 움직였다. 하지만 대원 중에는 적군에게 발각돼 죽음을 당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 영도유격부대원이었던 황철수씨가 3일 전사한 동료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그는“태종대에 손톱과 머리카락을 묻고 죽을 각오로 떠났다”고 했다. 오른쪽은 북파 직전 총기를 만지며 훈련을 받고 있는 영도 유격부대원들의 모습. /부산지방보훈청·영도유격부대전우회 제공
황씨는 민가까지 왕복에 3~4일이나 걸릴 만큼 깊은 산중에 동료 부대원들과 움막을 짓고 버텼다. 곧 겨울이 오면서 날씨는 영하 30~40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황씨는 "소변을 보면 아래에서부터 위로 고드름이 만들어질 정도였다"고 했다. 제때 보급이 되지 않는 바람에 식량 등을 구하러 민가로 내려갔다가 북한의 안전요원에게 들켜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겨울을 버텨낸 황씨 등은 1952년 5월 대원 6명과 함께 함경북도 무산군 연사면 철도 건설 현장에 침투했다. 중국(당시 중공)이 철도를 건설해 북한의 목재를 중국으로 실어나르려는 움직임이 포착돼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300여 명이 일하는 현장을 살피던 황씨는 북한군에게 발각됐다. 황씨를 비롯한 대원들에게는 빗발치듯 총탄이 날아들었다. 황씨 등은 퇴각하는 와중에 공사장 숙소에 재빨리 폭약을 설치해 폭파한 뒤 산으로 숨어들었다. 기적적으로 대원 아무도 죽지 않았고, 산짐승처럼 신출귀몰하는 이들을 북에서는 '산돼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얻은 정보는 무전으로 연합군 사령부에 전달됐다.
황씨 등은 1952년 7월 철수 명령을 받고 남한으로 돌아왔다. 황씨 작전구역에 함께 있었던 40여 명 중 생존해서 남한까지 돌아온 사람은 11명뿐이었다. 행방불명이 된 대원 상당수는 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Y 부대' 또는 '파라슈트 부대' 등의 이름으로 불린 영도유격부대는 이같이 공중과 해상으로 북한 후방에 침투해 기지 파괴와 정보 수집 같은 유격작전을 수행했다. 본부와 훈련소가 부산 영도에 있었고, 당시 육군 대위였던 한철민(예비역 중령·육사 8기) 대장 아래 반공청년 1200명을 중심으로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극비리에 설립됐다.
이들은 북한군 등 4800여명을 사살하고 탄약제조창, 군수물창고 등 각종 군사시설물을 파괴하는 공을 세웠다.
3일 낮 12시 부산 영도구 태종대 6·25 참전 영도유격부대 유적지에서는 이 부대원들에 대한 추모제가 열렸다. 유격부대원 유가족, 부산시 재향군인회, 53사단 관계자 등 200여 명이 참가했다. 참석자 중 생존한 북파 영도유격부대원은 황씨가 유일했다.
- 자료사진
부대 해체가 결정된 1952년 12월까지 북파됐다가 돌아온 영도유격대원은 900여 명 중 4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추모비의 전사자 명단은 491명뿐이다. 나머지는 신원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거나, 생사가 불분명하다.
"6·25가 아직도 휴전 상태이니, 우리 전쟁은 끝나지 않은 거야. 나라를 위해 생지옥에서 싸운 유격대가 잊히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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