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동맥경화 징후… '낙수효과'마저 사라져

2012. 10. 31. 09:06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Weekly BIZ] [칼럼 Inside] 한국 경제 동맥경화 징후… '낙수효과'마저 사라져

  • 송태정 우리금융지주 수석연구위원

경제의 스톡화
소득·소비·투자 변수보다 자산·부채가 더 중요해져 수출 늘어도 내수 안 살아나
富 주도형 경제의 폐해
일해서 얻는 소득보다 부동산 수익률이 높다면 근로·혁신의지 꺾일 것

송태정 우리금융지주 수석연구위원

1989년 일본 정부는 '연차경제보고서'에서 '경제의 스톡화' 현상을 우려하였다. '경제의 스톡화'는 경제 내에서 자산과 부채와 같은 스톡(stock) 부문의 비중이 높아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 경우 소득·소비·투자 같은 플로우(flow) 변수보다 자산과 부채 같은 스톡 변수의 파급 효과가 커지게 된다.

'경제의 스톡화'를 질병으로 표현하면 '동맥경화'이다. 동맥의 탄력이 떨어지고 동맥에 생긴 혈전이 혈액의 이동을 방해해 동맥이 좁아지는 것이다. 동맥경화는 뇌졸중과 심근경색증뿐 아니라 돌연사를 일으키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그런 우려가 2년 후인 1991년 부동산 거품 붕괴로 표출됐다.

단기 압축 성장으로 세계 경제 발전의 성공 모델로 인정받던 한국 경제에도 동맥경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2010년 우리나라 경제규모(명목 국민 총소득·GNI)는 2000년 600조원에서 2010년 1175조원으로 1.9배 증가에 그쳤다. 그러나 토지, 주택과 같은 실물자산은 2000년 3400조원에서 2010년 7779조원으로 2.3배, 금융자산도 3592조원에서 1만329조원으로 2.9배 늘었다. 이에 따라 경제자산(실물자산+금융자산)은 6992조원에서 1조8107조원으로 2.6배 급증했다.〈그림 참조〉

그래픽=오어진 기자

경제 스톡화에 대한 부작용은 우리나라에서 가계와 기업, 정부, 금융 사이 경제 흐름의 선순환 고리가 약해지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수출이 늘어도 내수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성장을 해도 고용이 별로 늘어나지 않는다. 고소득층의 씀씀이가 커져도 저소득층의 생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위 그릇에 물이 가득 차서 넘치면 아래 그릇도 채워지는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가 약해진 것이다. 소득 양극화가 '자산 양극화'로 이어지는 모습이 특히 우려된다. 계층 간 소득격차 확대가 장기화되면 자산 양극화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이 경우 사회불안 확대와 함께 계층 간 이동이 줄어드는 등 사회의 역동성이 약화한다. '경제 스톡화'의 치명적인 부작용이다.

정책 효과도 감소한다. 금리를 올리고 싶어도 이자 부담 증가 우려 때문에, 재정 지출을 늘리고 싶어도 물가상승 압력과 재정 적자 문제 등으로 정책을 쓰는 데 걸림돌이 많다. 경제 흐름이 원활하지 않고 정책 수단도 제약을 받는 상황이 오래간다면, 일본과 유사한 장기불황이 한국 경제에도 펼쳐질 수 있다.

'젊을 때 부지런히 일해 재산을 모은 다음 노후에는 그 재산을 헐어 쓰며 산다.' 우리의 일생을 재무적 관점에서 보면 대략 이런 모습이다. 국가 경제도 비슷하다. 경제가 성숙 단계에 들어서면 소득보다는 자산에 기대어 생활하는 국민이 많아진다. 개인이든 국가든 연륜이 더해질수록 경제의 기반이 소득이라는 플로우 변수에서 자산이라는 스톡 변수로 옮아가는 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개인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이 국가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공급이 한정된 부동산에 대한 투자 수익률이 기업의 투자 수익률을 웃돌게 된다면, 자연히 근로 및 투자 의욕이 꺾이고 혁신 의지가 감퇴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모럴의 퇴락은 하버드대 마이클 포터(Porter) 교수가 말한 '부(富) 주도형 경제'의 조짐이거나 그 전형적 양상이다. '부 주도형 경제'는 '경제 스톡화'의 부정적 귀결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부 주도형' 단계로의 쇠퇴를 막으면서 경제의 스톡화 추세를 잘 관리할 수 있을까? 열쇠는 경제의 역동성 회복에 있다. 한국 경제 내부의 플로우 부문을 강화하고 진취적 모럴을 고취하면서 해외 부문에서 스톡 부문의 비중을 높이는 것이다.

먼저 국내적으로는 기업투자 활성화와 혁신적인 연구개발(R&D), 높은 근로 의욕 등 긍정적 플로우 요소를 진작시켜 경제의 원동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국내 자산스톡에 대한 투기를 억제하고 생산성의 차이는 인정하되 고용상 차별을 해소하고, 담합 같은 불공정 경쟁, 각종 진입 장벽 등 경제의 선순환 고리를 차단하는 요인들을 줄여야 한다. '경제 민주화'에 대한 최근 논의도 이런 맥락이다.

둘째, 대외적으로는 개인의 재산증식 욕구를 해외 투자로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 남아도는 자본을 해외로 투자함으로써 자본의 생산성 저하를 막고, 국내 자산시장의 인플레이션 압력도 줄일 수 있다. 이는 국내 금융회사의 글로벌화에도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변화와 혁신, 선순환 경제를 통해 한국 경제의 파이를 키우는 동시에 해외로 진출해 외국에서 우리 몫의 파이를 늘려야 한다. 이런 노력을 통해 경제주체들의 '경제하려는 의지'를 북돋는 게 급선무이다. 한국 경제의 혈관에도 혈전이 쌓이고 있다. 이를 걷어내야 한다. 관건은 어떤 치료법을 언제,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과감하게 결정해 실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