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8. 21:33ㆍ지구촌 소식
[월드리포트] 21세기 천하무림대회의 모습은?
SBS 우상욱 기자 입력 2013.08.07 09:51
조금은 부끄러운 얘기입니다만 제 베이징 특파원의 운명은 한 권의 무협지에서 시작됐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지금은 없어진 출판사에서 책 한 권을 무료로 보내줬습니다. 포장을 뜯어보니 '영웅문'이었습니다. '음, 삼국지의 아류작쯤 되겠군.' 그렇게 책장 한 구석에 꽂아놓고 잊어버렸습니다.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때 쯤 무료했던 저는 책장을 둘러보다 그 '영웅문'을 발견했습니다. 심심풀이를 위해 뽑아들었습니다. 제 평생 처음으로 읽은 무협지였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에 상상도 못했던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책을 순식간에 다 읽고나서 깨달았습니다. 제게 보내준 그 한 권은 모두 3부 18권짜리 대하소설의 1부 첫번째 권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출판사의 의도에 제대로 낚인 셈입니다. 용돈으로 그 책을 다 사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어찌할까….
궁하면 통한다고 불현듯 기막힌 꾀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주무시기 전에 꼭 책을 읽으셨고 읽던 책을 머리맡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당시 읽고 있던 책을 치워버리고 '영웅문' 1부 1권을 그 자리에 놔뒀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물어보시더군요. "그 영웅문이라는 책 2권은 있니?" "아니요, 아버지. 1부 1권 밖에 없어요." "자,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다 사와라."
이후 무협지의 세계로 빠져들었습니다. 다른 무협지는 읽지 않았지만 '영웅문'(원제는 영웅사조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을 쓴 진융(우리 발음으로 김용)의 무협소설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한창 때는 주인공들이 구사하는 무술은 물론 초식 이름까지 다 외웠을 정도니까 상당히 푹 빠진 셈이죠.
제가 재수를 한 데는 이런 무협지 탐독도 한 원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덕분에 중국 각 지방의 지리와 생활, 문화, 역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얻었습니다. 무협지에 오악으로 소개된 태산과 항산, 형산, 숭산, 화산은 제게 필수 여행 대상지가 됐습니다. 유명 문파의 본거지인 무당산과 아미산, 곤륜산을 죽기 전에 꼭 봐야지 하는 결심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의 싹이 크고 자라서 베이징 특파원이 된 듯 합니다.
서론이 길었던 이유는 제가 천하 무림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제부터 중국 서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우루무치에 있는 텐산에서 무림대회가 개최됐습니다. 게다가 소림, 무당, 아미, 곤륜, 공동, 청성, 매화당랑권, 형의권 등등 제 피를 끓게 했던 유명 문파의 장문인이 직접 참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협의 세계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설명을 덧붙이자면 축구팬들에게는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멘체스터유나이티드, 유벤투스가 주전들을 출전시켜 대회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는 베르사체, 버버리, 샤넬, 프라다, 구찌 등이 자사 최고의 제품을 들고나와 작품전을 벌이는 셈입니다.
'바쁘지만 않았으면 천금을 들여서라도 출장을 갔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대신 관련 기사를 있는대로 모았습니다. 무림대회를 간접적으로나마 즐기고 싶어서요. 바다를 가르고 산을 뽑아버릴 듯한 기세의 내공, 천변만화의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초식, 눈으로 따라갈 수도 없을 만큼 빠르고 경쾌한 경공 등. 제 상상속에서 그려졌던 무협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실현될 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확인한 21세기 천하무림대회의 모습은…우선 첨부한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각 문파의 무공이 얼마나 진보를 이뤘는지, 어느 문파의 무공이 더 우월한지, 누가 강호의 맹주인지 가리는 옛 무림대회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각 문파가 고유의 초식을 소개하고 약속 대련을 통해 기술을 '선보이는' 행사에 그쳤습니다.
또 이번 행사는 중국비물질문화유산확산센터, 베이징대학문화자원연구센터, 그리고 미국촬영협회가 공동으로 주관했습니다. 앞의 두 단체는 대충 이해가 가는데, 미국촬영협회는 뭘까? 이번 무림대회에 중국 쿵후에 대한 서양의 이목을 충족시키기 위한 의도도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싶은 지방정부와 중국 무예를 홍보하려는 중국 단체, 세계적으로 먹히는 컨텐츠로 뜨고 있는 중국 무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서양 자본이 힘을 모아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사일 뿐입니다.
참가자들은 진짜 각 유명 문파의 장문인일까? 현지 언론이 소림사측을 상대로 취재한 결과 소림사는 이번 대회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대회를 위해 소속 무예승을 파견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소림파의 장문인이라고 참가한 사람은 소림사 입교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소림파 무술을 가르쳐주는 학원의 원장으로 드러났습니다. 음, 사정이 이렇다면 다른 문파의 장문인들도 정체가 몹시 의심스럽습니다.무림대회 현장을 취재한 현지 매체 기자는 이렇게 슬쩍 비꼬아 기사를 썼습니다.
"참가자들은 각 문파의 제복을 입고 고유의 병기를 휴대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관람객이나 인터넷 누리꾼들은 '음식점 홍보단이나 중국 무협 드라마의 엑스트라들이 나온게 아닌지 확실해?'라는 의문을 표시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약속 대련을 지켜보는 무대 아래의 장문인들은 품속에서 각자 문파의 비전 암기를 꺼내들었습니다. 바로 아이패드와 삼성 휴대폰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술 초식을 열심히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그 현대와 과거를 넘나드는 모습에 누리꾼들은 또한번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그래서 누리꾼들은 이번 행사를 중노년층을 위한 코스튬플레이라고 평가하나 봅니다."
행사 모습을 촬영한 동영상을 보시면 이런 기자의 관전평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총알은 물론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21세기에 무술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예전처럼 내 몸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의미는 거의 퇴색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는 또다른 표현 예술로서의 기예이거나 몸과 마음을 닦는 수련 방법으로서의 의미가 더 커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술대회 역시 일종의 '쇼'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무협에 대한 영어 이름은 '오리엔탈 판타지'입니다. 서양인들에게 동양의 무협은 서양의 마법과 다름이 없습니다. 사실 인간의 몸으로 나무를 건너 뛰며 날아다니고, 장풍을 쏘아대고, 몸의 한 구석을 콕 짚기만 해도 온 몸이 마비되거나 심지어 죽는 무공이 가능하겠습니까? 그저 상상력의 산물이거나 천번 양보해도 대단한 과장일 뿐이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능력을 발휘하고 싶은 소망이 상상력에 탑재된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니 애초에 그런 모습을 현실 세계에서 보려했던 제 기대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저 같은 한심한 생각을 우려해서인지 무림대회에 참가한 한 무술인이 점잖게 충고를 했더군요.
"현실생활과 무협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우상욱 기자woosu@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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