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년' 넘어… 일본 실버산업, 기지개 켰다

2013. 10. 31. 20:04지구촌 소식

[Weekly BIZ] '잃어버린 10년' 넘어… 일본 실버산업, 기지개 켰다

  • 도쿄=오윤희 기자, 최원석 기자
  • 입력 : 2013.10.26 03:01

    시니어 비즈니스 전문 무라타 교수… 실패와 성공 이유를 말하다

    장밋빛 전망에서 깨어나라
    의외로 안 쓰고 덜 쓰는 사람 많아… 가시적 성과 보이기까지 10년 걸려

    물건 파는 법을 바꿔라
    대형 마트에서 한꺼번에 왕창 샀지만 나이들면 힘들어 편의점서 조금씩 구입
    백화점·노래방엔 의자 많이 갖다놔야

    일본에 고령자가 급증해 정부도 감당 못할 지경에 이르자, 후생성(한국의 보건복지부에 해당)이 기상천외한 프로젝트를 내놓는다. 'Z'라는 코드명을 가진 침대형 로봇을 개발해 노인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다는 것.

    침대형 로봇에 노인이 누워만 있으면, 로봇이 알아서 몸 상태를 읽어 벗겨주고 씻겨주고 입혀주고, 배변은 물론 성욕까지 모든 생리 현상을 처리해 준다. 로봇이 24시간 신체 신호를 감지해 이상 발생 시 응급조치하고 병원에 곧바로 알리는 꿈의 시스템.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해 로봇이 탈출하고 대소동을 일으킨다.

    이것은 일본에서 히트한 애니메이션 '노인Z'에 담긴 내용으로, 고령화 문제에 대한 일본인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지금 봐도 현실감 넘치는 이 작품이 22년 전에 나왔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공개된 1991년 일본의 고령화 비율(총인구에서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은 12%. 한국의 2013년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도쿄의 한 컴퓨터 동호회에서 70~80대 할아버지들이 애플 아이패드를 사용하는 장면
    일본 고령자 가운데 인터넷은 물론, 스마트폰·태블릿PC에도 능한‘스마트 시니어족’들이 늘어나면서 인터넷 유통 시장의 주력 소비계층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도쿄의 한 컴퓨터 동호회에서 70~80대 할아버지들이 애플 아이패드를 사용하는 장면 / 블룸버그

    도레이 경영연구소의 마스다 다카시(增田貴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을 '타임머신'에 비유했다. 즉 고령화 문제만 놓고 본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22년 전 일본으로 돌아가면 현재의 한국이 보인다는 것. 반대로 한국 입장에선 지금의 일본에서 벌어지는 여러 고령화 현상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야 볼 수 있는 일들이다.

    일본의 고령화 비율은 지난해 24%를 넘었다. 인구 4명 중 1명 정도가 65세 이상 노인이라는 의미다. 한국은 올해 12%에서 2020년 16%, 2026년 21%로 올라갈 것으로 통계청은 전망했다.

    이런 통계와 함께 실버산업에 대한 장밋빛 기대도 오래전부터 부풀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노인 인구의 씀씀이가 기대에 못 미쳤던 것이다. 의외로 덜 쓰고 안 쓰는 노인이 많았다. 고령화 선배 국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실버산업의 실패가 가져온 학습 효과 탓인지 요즘 일본에선 실버산업이 진지해졌다. 요즘 일본 재계는 노인 인구의 눈높이에 맞추고자 열심이다.

    기자가 일본의 시니어 비즈니스 전문가 무라타 히로유키(村田裕之) 도호쿠대학 특임교수를 찾아간 것은 그런 일본의 경험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의 사무실 책꽂이에 꽂힌 책의 대부분은 고령화와 관련된 책이었다. '시니어 비즈니스' '시니어 비즈니스 7가지 발상 전환' 등 그가 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도 보였다. 지난 7월 국내에서 출간된 '그레이마켓이 온다'도 눈에 띄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MBA를 땄고, 일본종합연구소라는 싱크탱크에서 일하다가 2002년 시니어 비즈니스 컨설팅 업체인 '무라타 어소시에이츠'를 설립했다. 2009년부터는 도호쿠대학 국제연구센터 특임 교수를 맡고 있다.

    빗나간 기대

    그는 "한국에 갈 때마다 아직은 한국인이 고령화를 피부로 느끼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면서 "하지만 몇 년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저는 (여러분이 곧 겪게 될 ) 미래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곤 한다고 전했다.

    ―한국에선 한때 실버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여러 기업이 실버산업에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만 놓고 봤을 때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시장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시장 규모를 따져 볼 때 고령화에 이어 초고령화가 진행된 일본은 한국보다 시장이 훨씬 큽니다. 2000년에 일본 정부는 개호 보험(介護保險·노인 간병을 지원하는 공적 보험)을 도입했고, 13년간 투입된 예산이 10조엔이 넘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 사이에 연령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團塊)' 세대는 1947~1949년 출생자인 데 비해 한국 베이비붐 세대는 1955~1964년생입니다. 약 8년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가 시니어가 되는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일본도 10년 전부터 시니어 비즈니스 붐이 있었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한국 실버 시장도 5~6년이 지나면 지금의 일본 상황과 비슷해질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일본 방송국 아마쿠사TV에 근무하는 세계 최고령 할머니
    일본 방송국 아마쿠사TV에 근무하는 세계 최고령 할머니 아나운서들. 해외 매체에서 화제가 되기 시작한 2008년 당시 105세의 모리 시노 할머니<왼쪽>와 92세의 구로카와 쓰루에 할머니 / 아마쿠사TV

    노인의 지갑을 여는 법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노인들은 당연히 소비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고, 자산이 많은 노인도 언제까지 살지 모르니 소비를 자제합니다. 그렇다면 기업이 어떻게 해야 노인들의 소비를 유도할 수 있을까요?

    "말씀하신 대로 일본의 세대당 순금융자산은 60대와 70대가 가장 많습니다. 하지만 시니어의 특징은 '고자산 빈곤층'이라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산은 많지만 현금은 적은 '캐시 푸어(cash poor)'입니다. 대부분 연금으로 사니까 소비를 줄이고, 앞으로 닥칠지 모를 여러 위험 부담을 대비해서 돈을 장롱에 넣어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나 돈을 안 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만약'을 위해서는 충분히 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동이 부자연스러워져서 노인 요양원에 간다든지, 간병인을 들이기 위해서 집을 리모델링한다든지 할 때 말입니다. 노인의 이런 특성을 잘 파악하면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습니다."

    무라타 교수는 시니어의 소비를 유도하는 첫째 기회는 그들이 퇴직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일본 남성은 대략 60대에 퇴직하면서 퇴직금을 받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이 여행을 떠납니다. 또 앞으로 월세를 받아 살기 위해서 주택을 리모델링하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차를 바꾸기도 하지요. 기름을 많이 먹는 큰 차 대신 기름을 덜 먹는 경차로 바꾸는 겁니다. 스포츠센터에 등록하기도 합니다.

    둘째로 시니어 층은 건강이나 안위와 관계되는 일엔 비교적 큰돈을 씁니다. 요양 보호 서비스를 받을 때를 대비해서 집을 리모델링하는 게 그 사례입니다. 또 나이가 들면 먹는 양은 줄어들지만, 조금 비싸더라도 몸에 좋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유기농 야채 같은 것이요.

    물건을 사는 방법도 예전엔 마트 같은 데서 한꺼번에 왕창 샀지만, 나이가 들면 편의점에서 조금씩 구입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큰 수퍼마켓은 매장이 너무 넓어서 시니어 소비자가 장을 보다가 금방 지쳐 버리기 때문에 꺼리게 되죠. 그래서 최근 2~3년 사이 일본 편의점에 시니어 고객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본의 대형 마트에선 층간 이동 에스컬레이터 속도가 아주 느립니다. 노년층 고객이 다치면 안 되니까 그렇게 고친 거지요. 계란은 예전엔 한 팩에 10개를 포장해 팔던 것을 이젠 4개만 넣는 식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노인은 인터넷이나 SNS에는 취약합니다. 그렇다면 기업은 시니어 소비층을 겨냥해 어떻게 PR을 해야 합니까?

    "시니어의 자녀, 혹은 손자와 손녀를 타깃으로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전화 회사 중에 NTT도코모가 올해 노인 전용 스마트폰인 '라쿠라쿠'를 출시해서 시니어 층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제가 그때 컨설팅을 했었지요.

    그렇다면 PR 방식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노인 전용 스마트폰을 손주랑 함께 쓰면 통신 요금을 절감해 준다든지, 노인-자녀-손주 3대가 이용할 경우에 전화 요금을 할인해 준다든지 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걸 젊은 세대에 집중적으로 홍보하는 겁니다. 도쿄의 일부 레스토랑이나 도쿄 디즈니랜드에선 노인-자녀-손주 3세대가 오면 할인을 해 줍니다."

    ―실버 마케팅의 성공 사례로 식품 매장에 고령층이 좋아하는 장아찌를 200종류 이상 비치한 다이신백화점을 책에서 소개했습니다. 그 외 또 다른 성공 사례는 무엇이 있을까요?

    "'커브스(Curves)'라는 여성 전용 스포츠 센터가 있습니다. 미국 프랜차이즈인데 일본에 처음 도입할 때 제가 컨설팅을 맡았습니다. 8년 만에 급성장해 지금 일본에 1388개 점포가 있는데, 이용자의 평균연령이 58세입니다.

    일본의 피트니스 인구는 전체 인구의 3% 정도밖에 안 됩니다. 왜 피트니스센터를 싫어하느냐고 물으면 그런 곳은 접근하기 어려운 기계들이 있고, 젊은이들이 막 무섭게 근력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아,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구나. 뭔가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도 너무 많이 걸리지요. 운동하고 샤워하고 하려면 2시간씩 걸리니까요.

    커브스는 여성만 회원으로 받는 데다,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을 30분 안에 모두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해 심적 부담을 줄였고, 그 결과 주요 이용자가 시니어 여성이 됐습니다. 시니어는 자신이 간병 대상이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으로 가기 전에 스스로를 관리하려 하지요. 앞으로 간병, 간호보다는 커브스처럼 건강관리, 질병 예방 사업이 시니어 시장에서 성공할 것입니다."

    노인이 좋아하는 곳과 싫어하는 곳

    무라타 교수

    ―실버타운의 성공 가능성은 어떻게 보시나요.

    "실버 커뮤니티는 미국에선 몰라도 한국과 일본에선 성공하기 어려운 모델입니다. 일단 미국은 토지가 넓고 땅값이 싼 반면, 일본이나 한국은 국토가 좁은 데다 땅값이 비싸요. 게다가 문화적 차이도 있어요. 미국은 예를 들어 55세의 건강한 사람이 은퇴자 마을 같은 데로 이주하는 데 거부감이 없습니다. 반면 일본은 가능한 한 자신의 집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며 살고 싶어 하고, 병이 있는 사람만 요양시설 같은 곳을 찾습니다."

    ―시니어를 중심 고객층으로 전환한 기업이나 사업의 사례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선 기저귀가 있습니다. 원래는 아기들의 것이었지만, 유니참이라는 곳에서 성인용 기저귀를 만들어 호평을 받았지요(일본은 2010년 성인용 기저귀 매출이 유아용을 추월했다). 또 요즘 가라오케에 가보면 평일 낮에는 시니어들만 북적거립니다. "

    ―한국은 아직 안 그런데요?

    "곧 그렇게 될 거예요. 또 게임방에 가 보세요. 원래 젊은이들의 장소였지만, 지금은 게임의 성격에 따라 시니어가 주요 고객층이 된 곳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게임인가요?

    "코인 게임 같은 것이 그래요. 그리고 패밀리 레스토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평일 낮에 가면 시니어가 엄청나게 많이 옵니다."

    ―주요 고객층이 시니어로 바뀌면 마케팅 방식도 바뀌어야 하겠네요?

    "좋은 질문입니다. 가라오케를 예로 들어볼까요? 일본의 가라오케에선 약간의 식사를 대접하는데, 대부분은 포테이토칩이나 닭 날개 같은 기름진 음식입니다. 이제까지 주 고객이 젊은이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시니어는 그런 기름진 것을 잘 안 먹습니다. 그러니 일식 정식이나 생선 요리 같은 걸로 바꾸는 것도 좋지요. 한국에선 비빔밥 같은 것이 되려나요. 패밀리 레스토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진 아이들을 겨냥해서 햄버거, 카레, 스파게티 같은 칼로리 높고 기름기 있는 메뉴를 많이 만들었지만, 이젠 고령자들이 좋아하는 메뉴로 바꿔야 합니다."

    ―게임방은 어떻게 전략을 바꿔야 할까요?

    "우선 휴식용 의자를 많이 비치해야 합니다. 요즘 일본 백화점에 가 보면 매장 곳곳에 의자가 엄청 많아요. 노인들이 오래 걸으면 피곤하니까 앉아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게임방도 게임을 계속하다 보면 체력이 달려 피곤해지니까 적당한 곳에 앉아서 쉬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의자가 없으면 피곤해서 다른 곳으로 가 버리겠지요."

    ―실버 시장에선 매스마케팅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셨죠. 어떤 의미인가요?

    "모든 시니어층을 한데 뭉뚱그려서 '시니어 시장'이라고 칭할 만한 큰 시장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시니어는 다양한 마이크로 마켓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커브스의 성공 사례에서 보듯이 사소하지만 개인적인 취향들이 반영된 마이크로 마켓이 수없이 많이 모여 있는 거지요. 또 같은 노인이라도 50대와 60대, 70대의 취향이 저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어 '미용이나 체형 유지를 위해 정기적으로 하는 활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50대 여성은 '보조 약제 섭취'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는데, 60대 여성은 '운동'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니 시니어는 다양한 마이크로 마켓(micro market·아주 작은 시장)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도성장기엔 한 물건을 대량으로 만들어 확 풀어버리면 됐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특히 시니어 시장은 매스마케팅으로 접근을 해선 안 됩니다."

    ―교수님의 컨설팅을 받은 뒤에 실버 시장에서 성공한 사례로는 어떤 것이 있나요?

    "'이키이키'라는 잡지가 있는데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입니다. 20만부 이상 팔리고 있어요. '암 같은 중병에 안 걸리기 위해선?' '기모노 수선 방법은?' '남편과 사별하고 난 뒤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하나?'처럼 중장년층 여성들이 관심을 갖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라이프 스타일 잡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