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맥경화' 돈이 풀려도 돈이 안돈다

2016. 4. 11. 21:20C.E.O 경영 자료

'돈맥경화' 돈이 풀려도 돈이 안돈다

화폐발행 잔액 1년새 10조늘어 90조 돌파매일경제 | 이상덕 | 입력 2016.04.11. 17:28

시중에 돈이 풀려도 돈이 안 도는 ‘돈맥경화’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6월 기준금리를 사상최저치인 1.50%로 낮춘지 벌써 9개월이 흘렀다. 통화 완화 정책이 지속되면서 한국은행이 발행해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현금 규모가 사상 처음으로 90조원을 넘어섰다. 문제는 민간에서 금리하락과 함께 소비지출과 투자를 늘릴 것이란 경제학 상식과는 오히려 정반대로 소비와 투자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는 기현상이 계속 되면서 통화유통속도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다.

◆5만원 한 달새 1조1000억원 늘어

1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2월 말 현재 한국은행 화폐발행잔액(말잔)은 90조7942억원으로 전년 동월 보다 12.8% 늘었다. 1년새 약 10조3000억원 증가한 것이다. 화폐 발행잔액이란 한은이 시중에 공급한 화폐가운데 한국은행 금고로 다시 돌아온 금액을 빼고 현재 시중에 남아 유통되고 있는 현금을 뜻한다. 화폐발행잔액은 2014년 8월 70조6124억원으로 70조원 선을 넘어섰고 작년 2월 80조5022억원으로 80조원 선을 돌파했다. 이에 대해 한은은 “5만원권 수요 증가로 시중에 10만원권 자기앞수표보다 5만원권 유통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2월 화폐발행잔액을 화폐 종류별로 보면 5만원권이 67조8516억원으로 전월 보다 1.7% 늘었다. 1만원권은 17조5585억원으로 0.1% 늘어나는데 그쳤다. 5만원권은 2009년 6월 첫 발행됐는데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5만원권 환수율은 40.1% 수준으로 2014년 25.8%에 비해서는 높아졌지만 다른 화폐들이 80%를 넘는 것에 비해서는 여전히 낮은 것이다. 5만원권은 발행되면 유통 후 은행으로 환수되기 보다는 상당 부분 어딘가에 저장된다는 뜻이다.

◆통화유통속도 0.71로 낮아져

투자와 소비 심리가 얼어붙다보니 본원통화(화폐발행액, 지준예치금)가 창출할 수 있는 통화량도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이 본원통화 1원을 공급했을 때 시중에서 얼마나 신용이 창출되는지를 나타내는 통화승수(본원통화대비 M2, 평잔 계절조정)는 올 1월 현재 17.3배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 말은 한은이 1원을 시중은행에 흘려보내면 시중에 17.3원이 창출된다는 뜻이다. 통화승수는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 1996년 7월 17.3배에 달했던 통화승수는 1997년 외환위기 직후 경기부양정책, 신용카드 발급 유도 정책 등에 힘입어 팽창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1998년 4월부터 1999년 8월까지 30배를 넘었다. 이후에도 2013년 11월까지는 20배 수준을 유지했지만 글로벌 경기가 장기 침체에 접어들자 작년 9월부터 17배 수준으로 하락세다. 1월에 기록한 17.3배는 19년 6개월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한 단위 통화가 거래에 사용되는 횟수를 나타내는 통화유통속도도 지속적으로 하락세다. 광의 통화(M2) 대비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가리키는 통화유통속도는 작년 0.71로 집계됐다. 2008년 0.81 수준이었지만 이후부터 0.7대로 내려 앉은 것이다.

통화승수가 낮아지고 통화유통속도가 떨어진 것은 그만큼 돈이 안돈다는 뜻이다. 다만 김인철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한은이 예전에는 통화량을 관리했지만 이제는 기준금리를 조정해 경기를 움직인다”면서 “때문에 유통속도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유동성 총량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올 1월 광의의 통화 M2는 2266조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8.1% 늘었다.

◆ 금리 떨어지면 저축 더 늘려

시중에 풀린 통화량이 늘어도 돈맥 가뭄이 계속되는 까닭은 고령화와 저금리 추세가 강화되는 추세속에서 은퇴를 대비해 저축을 늘려야 한다는 심리가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기 국채 금리가 5%에서 2%로 낮아질 경우 은퇴에 필요한 자금은 3배로 늘어나게 된다.

래리 핑크 블랙록 최고경영자는 이날 투자자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마이너스금리 등 중앙은행들의 공격적인 금리 인하는 소비와 지출에 부정적인 악영향을 미친다”며 “민간 경제주체들이 금리가 낮아지자 은퇴후를 대비해 오히려 저축을 늘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이 두가지 경우에 본원통화 공급이 늘어도 시중의 돈이 증가하지 않아 돈맥경화 현상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한은에 따르면 4월 현재 필요지급준비액은 52조원 수준으로 만일에 대비한 금액을 제외하고는 초과지준 규모는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돈이 회전하는 속도가 떨어진 것은 소비와 투자 심리가 예년만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경기가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현금부터 움켜쥐려는 국민들이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한은이 전국 가구주 1100명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4 가구중 1가구(24.5%)는 “금리가 하락할 경우 보유 현금을 늘리겠다”고 답변했다. 5가구 중 2가구(38.7%)는 “경제 불확실성이 확대되면 보유 현금을 늘리겠다”고 응답했다.

[이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