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눈치만 보던 시대, 청년들 기살려주려 '광개토태왕' 썼다"
2017. 8. 19. 18:37ㆍC.E.O 경영 자료
입력 : 2017.08.19 07:00
‘헬조선' 청년들에게 ‘태왕(太王)의 후예’ 자부심 물려주려, 소설쓰기 결심
머지않아 중국대 한국 ‘문명 전쟁’ 벌어질 것, 창성했던 고구려는 역사적 사실
조선일보 기자 시절 특종왕, 비결은 ‘인간 관계’ 관심 놓지 않은 것
“우리가 어떤 일을 할지 말하겠다.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용맹한 자들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로 묶였다. 우리는 고구려를 위대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도 짧은 시간 안에 해낼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만들 것이다!” 고구려군의 눈과 귀가 태왕에게 빨려들어 갔다.
“낮게 태어났어도 임무를 다하고 공을 세우면 끝까지 높아질 수 있다. 각자가 세운 공을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광개토태왕' 중에서
- ▲ 조선일보에서 20년 기자 생활을 거쳐, 46세에 소설가로 데뷔한 손정미. 2014년 삼국 통일 직전 경주를 무대로 한 첫 역사소설 ‘왕경(王京)’을 펴낸 후, 잃어버린 영토를 찾아서 중원을 탐사한 후 소설 ‘광개토태왕'을 완성했다. /사진=이태경 기자
그래서일까. 기자 출신 소설가가 쓴 책을 대할 때면 자세가 좀 달라진다. 매일매일 숨가쁘게 쏟아지는 ‘비극'과 ‘소란'을 건져 올렸던 사람들. 살인, 강도, 사기, 붕괴, 화재, 추락, 집회, 시위… 이 사회의 온갖 악다구니를 제일 앞서 목격한 그들은, 과연 인간 사회에 대해서 무엇을 더 쓰고 싶어할까. 논픽션이 아닌 픽션의 세계로 그들을 끌어낸 동력은 무엇일까.
어쩌면 헤드라인 하나로 ‘선의와 불의’를 가르는 프레임 제공자의 혐의를 벗고 싶어서, 어쩌면 육하원칙의 무자비한 기술만으로는 궁지에 몰린 인간을 설명할 수 없어서, 조급한 추궁의 세계가 아닌 거대한 미궁의 세계와 만나서 싶어서, 그들은 어차피 의혹으로 가득한 팩트의 국경을 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의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을 읽을 때,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나 ‘댓글 부대' 등을 읽을 때, 나는 그들이 출신 성분이 어쩔 수 없이 한국 사회의 기자였음을 감지한다. 소설의 무대가 과거의 전쟁터든, 현재의 ‘헬조선'이든, 사건 현장에서 치열하게 거리를 두며 진입하려는 ‘르포라이터의 의지', 그 ‘진격의 힘'이 무시무시하기 때문이다.
기자 출신 소설가 손정미가 쓴 ‘광개토태왕'은 좀 다르다. 그는 사건 현장이 아닌 고대 영웅의 일대기를 택했다. ‘광개토태왕'은 1600년 전, 우리 민족 최대로 강성했던 시절을 무대로 한다. 18세에 왕의 자리에 오른 뒤 21년간 고구려 이끌었던 최고의 정복 군주 광개토태왕. 412년, 그가 39세를 일기로 왕위를 장수왕에게 넘겼을 때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대국이 되어 있었다.
무대가 무대인지라 그의 소설엔 현장을 드라이하게 기술하려는 르포라이터의 의지보다 역사의 빈터를 환상과 리얼리즘의 퍼즐로 살려내려는 이야기꾼의 기지가 돋보인다. 조직이 치밀하고 생생한 손정미의 단문은 최고의 CG 기술이 되어, 한때 창성했으나 침몰하여 형체를 알 수 없었던 고구려 제국의 정복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 ▲ 고구려 제19대 왕으로 18세에 즉위해 39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불꽃같은 생애를 살았던 광개토태왕. 그의 정복 지도.
손정미는 ‘광개토태왕'을 통해 우리 민족이 자부심을 회복하길 바랐다고 했다. 왕중의 왕이라는 뜻의 ‘태왕'이라는 호칭, 나아가 작가로부터 우리는 위대한 ‘태왕의 후예'라는 말을 반복하여 들으니, 이 소설이 드라마 제목 ‘태양의 후예'보다 더 사실적인 드라마로 다가왔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중국 땅 ‘집안 시'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문’에서.
-SNS 시대 청년들은 점점 더 구별을 불편해하고 세계 시민이 되고자 하는데, 굳이 역사와 민족이라는 카테고리를 꺼내든 이유는 무엇인가?
“소설 쓰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역사를 공부했다. 나와 공동체의 정체성을 알아갈수록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느낀 자부심을 독자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내 삶이 비루하다고 느껴질 때, 우리 가문이 할아버지 때부터 잘 살았고, 좋은 일을 많이 했던 훌륭한 집안이었다는 걸 알면 자부심이 느껴질 거로 생각했다. “나, 이런 사람의 후손이야.”. 훌륭한 선조의 피를 받았다는 걸 알면, 시야가 넓어질 것이다. 나와 우리 가족만 보는 비정한 경쟁에 갇히지 않고, 전체의 운명을 보길 바랐다.”
-1600년 전 역사를 재현해낸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조상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늘 두려웠다. 시간적으로도 가깝고 자료도 많은 조선 시대를 쓰면 더 쉬웠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시대에는 관심이 없다. 조선은 역사적으로 위축되고 눈치만 보던 시절이었다.”
- ▲ 2권으로 이뤄진 소설 ‘광개토태왕'. 철의 리더십을 지녔던 광개토태왕의 짧은 생애를 통해 치열한 전투 현장, 융성했던 수도 평양성의 모습, 궁중의 풍속 등을 정교한 서사로 완성했다.
“만주는 실제 비옥한 곳이 많고, 중앙아시아는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고구려인들은 어려서부터 말을 타고 장거리를 빠르게 주파할 수 있었다. 농사와 유목에 모두 탁월해 반농반목이 가능했다. 로케이션은 반반이다. 태왕처럼 리더가 강하면 밀어붙일 수 있고, 장수왕처럼 아버지가 따놓은 과실을 다 받아먹은 후 나중에 쇠락해질 수도 있다.”
-기자는 팩트를 다루는 사람이다. 소설을 쓸 때 어떤 부분이 도움이 되던가?
“20년간 글쓰기를 했다는 것 자체가 큰 자산이 됐다. 오랜 기간 신문사 데스킹을 받으면서 어려운 한자에 갇히지 않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격조 있게 전달하려고 했다. 그 습관이 도움이 됐다.”
그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 나이는 46세였다. 오랜 고민 후 내린 결정이었지만, 현실은 칼바람 부는 황무지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매일 아침 모여드는 독자 앞에서 여봐란듯이 자음과 모음을 칼같이 휘두르던 언론인이 ‘가성비 최악'의 글쟁이가 된 것이다. 소설 한 권을 팔면 작가 몫으로 떨어지는 돈은 달랑 천 원.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책을 몇 권 팔아야 이걸 살 수 있을까를 자문했다"고 그는 말했다.
오로지 글 쓰는 자의 자부심을 여비로 가불해 중앙아시아로 떠났다. 중국의 집안, 심양, 백두산, 흑룡강성, 대흥안령, 하북성, 실크로드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을 돌았다. 광활한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고구려의 흔적을 발견한 건 큰 수확이었다. 수나라의 수양제가 중앙아시아 유목 부족의 천막에서 고구려 사신이 다녀간 그림을 보고 놀랐다는 기록도 찾았다.
-추적해 보니 광개토태왕은 어떤 사람이었나?
“그는 정복군주였다. 그 시절엔 참혹한 전쟁이 삶 그 자체였다. 산업이 따로 없었기에 전쟁을 통해 땅과 물자를 수급했다. 놀라운 건 그는 칭기즈칸이나 알렉산더 등 다른 정복 군주처럼 약탈과 노략질로 정복지를 초토화하지 않고 덕으로 통합해 나갔다. 자치통감을 보면 큰 무례를 범했던 연나라를 고구려 유민 출신이 세웠다는 이유로 완전히 진압하지 않았고, 삼국사기만 봐도 신라와 백제에 ‘동족의 예를 베풀었다'고 쓰여 있다. 신라, 백제, 일본과 러시아, 중국까지 그 세를 뻗어 나갔지만 자유와 안락을 주는 정복자였다. 팍스로마나처럼 팍스고구려를 이끌었다.”
-그 부분에선 간간이 한무제나 진시황의 잔혹성과 비교돼서 읽히기도 했다.
“중국의 황제는 거대한 궁전과 능을 세우기 위해 백성들을 강제 노역으로 희생시켰다. 그것과 비교하면 고구려의 창대했던 유물은 현재 남은 게 거의 없다. 광개토태왕비와 잔잔한 고분뿐이다. 하지만 고분만 봐도 알 수 있다. 수리적 계산이 치밀하고, 벽화 등에도 총체적 예술이 뒷받침되어있다.”
그는 “머지않아 중국과 우리가 문명 전쟁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고구려 지역이 북한과 중국 일대에 걸쳐있어 국사학계에서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걸 아쉬워했다. 동북공정에서 한국과의 문명소유권을 두고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지기 전, 소설로 미리 포석을 두자는 심산도 있었다. “문명싸움으로 들어가면 우리도 만만치 않은 저력이 있다.”
- ▲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 가득 찼고 위엄과 무공은 온 세상을 덮었던’ 한 남자의 짧고 불꽃같은 생애를 그리다, 온 에너지가 다 빠졌나갔다는 작가 손정미./사진=이태경 기자
“그 시절의 왕은 조선시대 군주 정도가 아니었다. 제정일치 시대였고, 영이 깨어있던 시대였다. 신단을 지키던 신군인 조의선인도 영적인 정예부대였다. 광개토태왕은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다.”
-높은 경지란 무엇인가?
“우리는 영적인 힘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지만, 취재해보니 그 당시엔 도가적인 파워가 실재했다. 사명대사도 왜병이 방안에서 불태워 죽이려고 했는데, 수염에 고드름이 맺혔다고 하지 않나. 을지문덕은 적은 수의 고구려군으로 중국의 수십만 대군을 무찔렀다. 삼국유사를 보면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댓잎을 꽂은 병사들이 울면서 사라졌다, 라는 대목도 있다. 기록을 보면서 도의 세계가 마냥 허황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논리적 상상력인가?
“허황하다는 느낌은 리얼리티가 없을 때 갖는 느낌이다. 3년간 수백 권의 책을 읽고 광야를 헤매면서 별처럼 흩어진 자료를 모았다. 집중력을 다해 자료의 맥락을 이해했고 윤곽을 잡았다.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상상력을 더한 부분도 있지만, 뿌리는 튼실하다.”
-‘태왕’을 만난다면 어떨까, 상상해본 적 있나?
“눈이 멀 것 같다(웃음). 중국의 황제를 천자라고 했듯, 그도 하늘의 자손이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격렬한 전투 장면이 주를 이룬다. 생생한 기술을 위해 어떤 자료를 참조했나?
“전통 무술책과 전쟁사에 관련된 책을 많이 봤다. 세계전쟁전법도해, 중국고대전쟁사전, 레브뤼크의병법사는 물론 손자병법과 무예도보통지, 한국무예사료총서를 읽었다.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을까 두려워 ‘단'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인 봉우 권태훈 선생의 저작물도 독파했다.”
-고구려의 황후들이 능숙하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그런 여전사들을 뽑아서 훈련했다. 책에 쓴 고구려의 정예부대 조의선인이 후에 신라로 이어져 화랑이 된다. 화랑의 원화는 여성 우두머리를 지칭하는데 제사권도 주어졌다. 그만큼 여성 선조들은 강하고 존중받았다.”
-현직 시절 어떤 기자였나?
“어릴 때부터 소설을 쓰고 싶었다. 신문사 기자가 된 건 그곳에서 간접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빡세기로 유명한 조선일보에서 사회부, 정치부, 산업부, 문화부, 국제부를 두루 경험했다. 기자 시절 특종을 많이 했는데, 일종의 ‘악바리' 기질 같은 게 있었다.”
-특종은 일반인에게는 관심 밖이지만, 기자 세계에서는 특별한 명예다. 비결이 있었나?
“행동은 느리지만, 끈기가 있는 편이었다. 사람을 관찰하다 ‘저 사람이 큰일을 할 것 같다'는 감이 오면 지속해서 관심을 두고 관계를 유지했다. 예외 없이 힘없어 보이는 사람이 나중에 큰 특종을 물어다 줬다.”
-데일리 뉴스 기자가 기나긴 역사를 다룰 때, 불편함이 있지 않던가?
“사건도 역사적 자료도 흩어져 있기에 맥을 잡아내기 쉽지 않은 것이다. 팩트 파인딩을 거쳐 빠른 시간 안에 핵심을 취재하는 법,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누구를 접촉해야하는가를 알아내는 법, 얻어낸 팩트에서 취하고 버릴 것을 분별해내는 법, 크로스체크를 통해 균형감각을 갖는 법 모두 기자 시절에 얻은 것이다. 소설은 취재가 기본이다.”
그는 소설가 박경리 선생과 인연이 깊었다. 문화부 기자 시절 ‘토지' 완간을 기념해서 박경리 선생을 인터뷰했던 게 첫 인연이었다. 박경리 선생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기자가 참 말이 없네'였다. 어떤 인연인지 고인의 원주 집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잤다. 어느 날 조심스레 습작을 보여드렸고, ‘해도 되겠다'는 천금 같은 말을 들었다. 눈앞에 막막하고 드넓은 창작의 광야가 펼쳐졌다.
“‘토지'를 읽으면 그분의 기가 느껴진다. 문장이 펄떡펄떡 살아 움직인다. 위대한 소설가였고, 부러운 사람이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고조선이다.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시절인데, 베일에 가려져 있다. 신화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역사로 설득력 있게 재현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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