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국빈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중국 베이징대를 찾아 ‘한중 청년의 힘찬 악수, 함께 만드는 번영의 미래’를 주제로 베이징대 교수와 교직원, 학생 300여 명을 대상으로 연설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연설 과정에서 “한국에는 중국의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비와 사당들이 있다”며 관우(關羽) 사당인 서울의 동묘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관제(關帝)묘, 전남 완도군의 임진왜란 참전 명장(明將)으로 진린(陳璘) 기념 사업 등을 얘기하면서 ‘정율성’이란 이름을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광주시에는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의 음악가 정율성을 기념하는 '정율성로'가 있다. 지금도 많은 중국인들이 '정율성로'에 있는 그의 생가를 찾고 있다”면서 ‘정율성’을 중국과의 연결고리로 삼으려 했다.
정율성은 광주 태생 중국 작곡가로 ‘중국 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와 중국인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延安頌)’ 등을 만들었다. 정율성은 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의 섭이(聶耳), ‘황하대합창’ 세성해(洗星海)와 함께 중국 3대 작곡가로 꼽힌다. 특히 중국 현지에서는 ‘혁명음악의 대부’ ‘군가의 아버지’로 불린다. 지금부터는 이 한국계 중국인 정율성을 현행 중국 인명 표기법에 따라 ‘정뤼청’으로 적는다.
일각에선 1934년 의열단장 김원봉이 세운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를 나온 정뤼청이 의열단원으로서 난징의 한 전화국에서 일본인들의 통화를 도청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얘기한다. 항일투쟁에 참여했다는 주장이다.
국내에서 정뤼청의 인생을 조명한 유일한 책 《정율성 평전》엔 이와 관련해 단 몇 줄만이 기술돼 있다. 정뤼청에 관한 여러 논문과 중국 측 기록을 살펴봐도 ‘의열단원 정뤼청’의 행적에 대해 알 길이 없다. 그가 실제 의열단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도 그건 정뤼청의 삶에서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다.
정뤼청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허베이성 한단시 타이항산(太行山)에 있던 조선혁명군정학교 살림을 책임진 교무장을 맡았다. 정뤼청이 이곳에 머물렀던 점을 거론하며 그가 조선독립을 위해 싸웠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는 중국 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따름이다.
국내에서 정뤼청의 인생을 조명한 유일한 책 《정율성 평전》엔 이와 관련해 단 몇 줄만이 기술돼 있다. 정뤼청에 관한 여러 논문과 중국 측 기록을 살펴봐도 ‘의열단원 정뤼청’의 행적에 대해 알 길이 없다. 그가 실제 의열단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도 그건 정뤼청의 삶에서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다.
정뤼청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허베이성 한단시 타이항산(太行山)에 있던 조선혁명군정학교 살림을 책임진 교무장을 맡았다. 정뤼청이 이곳에 머물렀던 점을 거론하며 그가 조선독립을 위해 싸웠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는 중국 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따름이다.
조선혁명군정학교는 김무정(6·25 당시 북한 인민군 2군단장으로 참전)이 이끄는 조선의용군에 속해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 연구원의 논문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비교 연구〉에 따르면 김무정이 장악한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 팔로군의 일개 무장 정치선전대에 불과했다.
‘혁명음악가’ 정뤼청은 해방 후 6년 동안 북한에서 활동했다. 그는 1950년 6·25전쟁에 참전해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등을 작곡했다. 현재 북한의 ‘조선인민해방군가’도 정뤼청이 지은 곡이다. 이를 감안하면 정뤼청은 한반도를 적화하려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선전(善戰)을 독려한 선동가다. 그에게 ‘6·25’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니라 ‘조국 해방 전쟁’ ‘항미 원조 전쟁’이었다.
‘혁명음악가’ 정뤼청은 해방 후 6년 동안 북한에서 활동했다. 그는 1950년 6·25전쟁에 참전해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등을 작곡했다. 현재 북한의 ‘조선인민해방군가’도 정뤼청이 지은 곡이다. 이를 감안하면 정뤼청은 한반도를 적화하려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선전(善戰)을 독려한 선동가다. 그에게 ‘6·25’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니라 ‘조국 해방 전쟁’ ‘항미 원조 전쟁’이었다.
광주광역시 남구 소재 '정율성로'다. 광주 남구청은 정율성이 한류의 원조라며 1억원을 들여 해당 거리를 조성했다. 사진=조선일보 |
정뤼청은 1963년 《북경만보》에 “노래는 오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무기이며, 혁명의 무기”라고 밝힌 것처럼 그의 노래는 6·25전쟁 당시 우리 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하는 또다른 ‘무기’였다.
중국 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을 지낸, 재중(在中) 작가 유연산은 중국 《인터넷 료녕신문》에 기고한 〈태양의 아들〉에서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은 정율성이 조선과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군과 연합군을 소멸하기 위하여 지은 것임은 변명할 여지도 없다. 가정해서 조선전쟁 당시 정율성이 한국군이나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사형을 당한다 해도 억울할 것이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광주광역시엔 정뤼청의 생가가 있고, 그를 기념하는 ‘정율성로’가 있다. 정율성로는 광주시 남구청이 1억원을 들여 정뤼청을 흉상을 설치하고, 조성한 거리(연장 233m)다. 또 광주광역시는 매년 ‘정율성 음악제’를 개최하고, 정뤼청을 ‘중국 한류의 원조’라고 내세운다.
정뤼청을 연구한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노기욱 박사는 과거 《월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정율성의 이력을 보면 광주가 열광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인데, 왜 지금 광주 사람들이 정율성을 가지고 저러는지 학자로서 지적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뤼청을 연구한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노기욱 박사는 과거 《월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정율성의 이력을 보면 광주가 열광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인데, 왜 지금 광주 사람들이 정율성을 가지고 저러는지 학자로서 지적하고 싶다”고 말했다.
평생 중국과 북한을 위해 살았고, ‘한반도 공산화’를 꿈꿨던 정뤼청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공산당에 바쳤다. 혈연적으로는 한국인이지만, 정신적으로 정뤼청은 철저한 중국 공산당원이다. 그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어떤 공헌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군과 중공군이 우리나라를 적화하려는 데 동참했고, 이를 독려했다. 이런 자를 우리가 기려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중국과의 선린을 위해 내세울 만한 자도 아니다.
글=박희석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