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실제 제2의 베트남으로 항해를 시작 했습니다.

2018. 6. 13. 19:35C.E.O 경영 자료

한국은 실제 제2의 베트남으로 항해를 시작 했습니다.

정외철님이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
· 20분 ·
참! 좋은 글 올리셨네요. 화중복 이라...

숨은 인재 현인들을
세상밖으로 많이 이끌어내는게 해결의 진정한 열쇠 입니다.

북한의 핵폐기, 개혁.개방이 국제 사기이고,
적화통일이 분명한 절대적 이유는???

북한은 이미 공산주의를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주의 체제를 사용해오고 있음.

또한 공개적으로 간첩 행위를 대통령부터 적와대와 정부,
민주당 등이 하고 있는데도

검찰 경찰 둘 중에 하나만 중심을 잡아도 되는데
둘다 완장 이라서 극히 위험한 상황 이지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공산화의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나라 속 사정이 밝혀져가니 희망 아니겠어요)

이렇게 복잡한 사연을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이런건 정부차원에서 알려야 하는데,
홍보하지 않음으로써 심각한 결과를 초래 할 것 예상.

가족 세습체제 주의는 베트남 모델도 될 수 없고,등등
(현재 김정은과 문재인은 베트남 모델로 가고 있는 중)

오르지 적화통일 이외엔 다른 길 이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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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혜

휴일 아침부터 많은생각을 하던중 불현듯 사회주의 공화국인 베트남이 생각난다.

베트남은 월남과 월맹의 역사가 있었는데 우리 남한과 북한의 역사와 매우 비슷하다. 아니 거의 똑같다.

프랑스는 제네바 협정(1954.7.21)에 따라 베트남에서 물러갔다. ...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물러간 것 처럼.

그 후 남과 북으로 나눠서
북쪽은 공산주의인 월맹이 남쪽은 자유진영인 월남이 맡게되었다.

그 후 월맹은 월남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게 된다.
6.25때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것처럼.

그 이후(1964) 미국은 침략당한 월남에 대규모 지원을 하고 전쟁도 도와주게 된다.
연간 500억 달러(53조9천억원)를 지원 함.

북한의 남침으로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남한 전지역이 초토화 되었을 때 미국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반전을 꾀할 수 있었던 것처럼.
또한 미국이 남한땅에 전쟁 후 벌어진 수많은 전쟁고아,식량을 해결하고 무수한 학교,병원,봉사단체 등을 세운 것처럼.

그러다 갑자기 미국이랑 월맹이 비밀협약(1968)을 맺게 된다. 전쟁을 안하기로 하고.

하지만 월맹의 속내의 목적은 미국이랑 달랐다.

무력으로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조금씩 미국을 내보내고
본인들 위주로 통일을 해야겠다' 생각해서 협약을 맺은것이었다.

그러면서 야당쪽에 자기들 인사들을 심어놓았다.
월남 야당 지도자중 '쭝딘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저 미군 때문에 같은 민족인 월맹애들을 죽이고 있다"

"같은 민족인 우리 민족을 더이상 살상하지 말자"
"월맹애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다"
"월맹애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전쟁을 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을 죽이는 저 미군들을 내보내자"

라고 외치며 미군철수, 반미시위를 주동했다.

월남은 정치적으로 굉장히 부패한 상황이었다.

야당 지도자들은 대부분 자본가, 평화주의자, 종교인, 인권주의자, 청렴하기로 유명한 정치가
이런 사람이니 여론은 당연히 야당쪽으로 기울었다.

월맹은 여당 진영에 있는 핵심 인사들을 하나 둘 씩 암살하고 자기 사람들을 보직에 앉게 했다.

그러자 점점 여당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고 점차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어지고 있었다.

인권을 주장하면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다수가 되고 자유진영에 있는 사람은 소수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엔 그게 월맹이 심어놓은 사람 때문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간첩들의 큰그림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파리에서 월남과 월맹은 평화폅약(1973.1.27)을 맺으며 잘사는 월남이 못사는 월맹에게 40억 달러(4조3천억원)를 원조하게 된다.

그리고 미군주둔은 전쟁이 있을 때 다시 들어오는 걸로 협약하고 결국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월맹은 이때를 기다렸다듯 월남에 있는 미국 대사관부터 공격(1975.3.10)했고,
미국에 할 수 있는 모든 연락 수단을 끊어버렸다.

미군이 떠나면서 월남에 항공기 700대, 전차 장갑차 400대 등 전쟁을 대비하여 구축시켜놓았던 상황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월남군인들 대부분은 월맹측 사람들(간첩)이었다.

월맹을 공격하라고 보냈던 전투기는
월남의 대통령 관저를 먼저 공격했고,
월맹을 공격하라고 보냈던 전차나 장갑차들은 월남의 주요기관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월남의 대통령은 해외도피를 했다.
월남의 상황은 아주 막장이었다.

결국 월남의 수도는 함락(1975.4.30)되었다.
그렇게 잘살던 나라 월남은 비교도 할 수 없이 못살던 월맹에 의해 순식간에 완전히 패망하게 되었다.

그 후 승리한 월맹은 평화를 외치고 반미를 주동했던 주요 인사들, 특히 월맹편에 서서 반미를 외쳤던 '쭝딘주'를 비롯한 언론인, 경찰, 정치인, 종교인, 평화주의자, 인권론자들부터 먼저 죽여버리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모두 순식간에 사형되었다.

그 후 자유진영에 찌들어 '공산주의'로 교화되지 못한 사람들은 교화한다는 목적으로 재교육수용소에 보냈고 모조리 죽여서 자유에 대한 씨를 말려버렸다.

미군이 철수 할 때 월남 대통령에게 물어봤다.
"너희 휴전중인데 우리가 이렇게 나가도 괜찮겠느냐" 는 질문에,

월남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월맹은 공산주의로 가난해졌고, 거의 굶어죽어서 사람이 없다. 우린 다수지만 그쪽은 힘없는 소수고 더이상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니 걱정말라."

베트남의 사회주의 통일이후 기존 월남의 국민들 대부분은 강제적인 월맹의 땅 이주를 당했다.
또한 서로 감시를 시키며 수상한 행동을 한 자는 가차없이 사형에 처했기 때문에 월남의 비교적 살기좋은 집이나 직장들은 월맹의 인민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잘살았던 월남의 자유는 이제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자유에 대한 방종의 댓가 너무 무섭지 않는가?

남의 일 같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