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에서 배우 조승우, '밀정'에서 이병헌, MBC 드라마 '이몽'에서 유지태가 연기한 김원봉은 일제 강점기 의열단 단장이었다.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3·1운동 직후 김원봉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무장 독립운동 단체였다.
무력 수단에 의한 독립을 목표로 했던 의열단은 1921년 9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며 이름을 알렸으나 비밀결사 조직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활동상은 지금껏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2013년 2월 말 의열단의 규모와 활동 방식을 기록한 영국 정보국 SIS(Secret Intelligence Service)의 비밀문서가 공개됐다.
영국 본국에 보고된 SIS 극동지부의 1923년 8월 보고서는 의열단에 대해 "약 2000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한국인 비밀결사체로, 한국과 일본에 있는 일본인 관리들을 암살하는 것이 (의열단의) 목적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고서는 "한 달 전에 이 단체 회원 한 명이 중국 청도에 있는 독일인이 만든 폭탄 160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100개가 한국으로 반입되었다. 현재 50여명의 회원이 도쿄에서 활동 중이다"라는 등 상세하게 기록했다.
1952년 5월 11일자 <로동신문>. 김원봉이 국가검열상에서 해임되고 로동상으로 임명됐다. 1953년 12월 22일 개최한 최고인민회의에서 정령 승인. |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의열단장 김원봉은 1938년 좌파 항일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대장이 됐다. 1942년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이끌고 임정에 가담한 그는 광복군 부사령관과 제1지대장을 맡았으며 1944년에는 임정 군무부장에 선임됐다. 하지만 그가 오히려 임정 파괴 공작을 벌였던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45년 12월 임정 요인 2차 환국단으로 귀국한 김원봉은 좌파 연합 정치 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 의장단으로 활동했고 1946년 6월 인민공화당을 만들었다. 그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출범할 때 국가검열상이 된 그는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했지만 1958년 김일성이 정적(政敵) 연안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함께 숙청됐다.
'김원봉 서훈'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존재하는 이유다. 물론 남과 북에서 모두 외면당해 온 월북 독립운동가를 서훈하자는 주장은 얼핏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김일성에 의해 죽은 좌파 독립운동가를 보듬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진영도 존재할 수 있다는 얘기다.
1957년 9월 20일 조선인민군 호외. |
하지만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김원봉은 조국에서 건국을 향해 사투(死鬪)를 벌이는 절체절명 순간에 북한을 선택한 인물이다. 독립운동을 했지만 그가 원한 국가는 북한이었다. 김원봉 서훈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대로라면 김일성에게도 대한민국 건국 훈장을 줘야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기념사에서 "광복군에는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어서 "통합된 광복군은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됐고,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6·25 때 북한군의 침략을 막다 희생된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는 날에 침략자들 편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일제 때 광복군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군의 뿌리인 것처럼 말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담긴 6.25 전쟁과 관련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이 치른 전쟁 중에서 가장 처참하고 피해가 컸던 전쟁이었습니다. 한국군(경찰포함) 62만 여 명과 유엔군 15만 여 명 등 77만 여 명이 전사, 부상, 실종되었고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이 1,000만 여 명이 넘었습니다. 이는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가족을 잃거나 헤어진 사람들은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글=최우석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