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괴물이 된 '문빠'

2020. 3. 29. 22:46C.E.O 경영 자료

[최보식 칼럼] 괴물이 된 '문빠'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20.02.21 03:20

문빠의 환심 잃을까 두려워하고

'우리 이니' 같은 미신 숭배자의 달콤한 말 즐기면 독재의 길로 갈 수도…

최보식 선임기자

그저께 청와대 대변인은 '그분을 좀 대변해달라는 대통령의 지시'라는 단서를 달고 브리핑했다. 그분이란 문재인 대통령 면전에서 "거지 같아요. 너무 장사 안돼요"라고 했다가 '문빠'에게 신상이 털리고 악플 세례를 받은 아산 전통시장의 반찬 가게 주인을 말한다.

대변인은 "그런 표현으로 인해 공격받고 장사가 더 안된다는 것에 대해 문 대통령이 안타까움을 표했다"고 말했다. 특정 개인에 대한 문빠의 '집단 공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대통령 언급이 나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전만 해도 대통령 지지자들이 자율적으로 그러는데 나설 일이 아니라고 방관해왔다.

그래서 일부 언론은 '대통령 지시가 있었다'고까지 밝히며 브리핑한 것을 청와대의 이례적 반응이라고 보도했다. 대통령의 선의인지 목전에 다가온 선거 때문인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평소에는 여론이 뭐라든 꿈쩍 안 했지만 지금은 많이 신경 써야 할 시점이 된 것은 틀림없다.

언론에서는 '문 대통령, 안타까움을 표시'라고 따뜻한 제목을 뽑았다. 하지만 브리핑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한 출입기자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대통령이 극렬 지지층에 자제 요청이 있었나?"라고 묻자, 청와대 측은 이를 장황하게 부정했다.

"악성 비난의 글을 쓰거나 하는 분들이 이른바 '문빠'이거나 한 것은 아니다. 이분(반찬 가게 주인)을 비난하는 분들은 오해를 한 거다. 거지 같다는 것은 요즘 사람이 쉬운 표현으로 한 것이다, 서민적이고 소탈한 표현이었다, 분위기가 안 나빴고 전혀 악의가 없었다. 대통령은 그런 오해를 풀어주려는 것이다. 예의 갖추지 않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분은 오해를 받고 있어서 이로 인해 생기는 피해가 안타깝다는 거지, 지지층에 대한 반응은 아니다."

요약하면 이렇다. 대통령에게 '거지 같다'는 식으로 예의 없이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실상 반찬 가게 주인이 예의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게 주인에 대한 공격은 오해에서 비롯됐다. 대통령은 오해를 안타깝게 여겨 풀어주려는 거다. 그리고 이는 '문빠'의 소행은 아니다. 이쯤 되면 정말 반찬 가게 주인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한 것인지 문빠의 행태를 변명해주는 것인지 헷갈린다.

MAKE THE CALL

균형 감각을 가진 대통령이라면 "칭찬을 기대한 적 없다. 대통령은 원래 욕을 듣는 자리다. 그렇게 해서라도 어려운 서민들의 속이 좀 풀렸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문빠의 보스가 아니라 국민의 대표자여야 한다는 점을 상기할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지지 세력이라 해도 반찬 가게 주인에게까지 집단 린치를 가하는 것은 '오해가 아니라 미친 행태'라고 지적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문빠들의 타깃은 주로 정치인이나 공직자, 언론인이었다. '공격 좌표'를 찍고 무차별 신상 털기와 악플, 문자 폭탄 테러를 가해 왔다. 한번 당해본 인사들은 문빠를 '히틀러 추종자' '문화대혁명 홍위병'이라며 학을 뗐다. 하지만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 세력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파괴 행위를 묵인해왔다. 문빠는 눈에 뵈는 게 없는 괴물처럼 됐다. 이제는 반찬 가게 주인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 여주인에게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형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짓을 숨어서 벌여온 문빠들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3년 전 문재인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됐을 때 "18원 후원금, 문자 폭탄, 비방 댓글 등은 문 후보 측 지지자에서 조직적으로 한 것이 드러났다"고 질문받자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답했다. 지금은 중기부 장관이지만 당시 반대 진영에 섰던 박영선 의원은 "아침에 눈뜨니 문자 폭탄과 악성 댓글이 양념이 되었다. 양념이라는 단어의 가벼움에는 문 후보가 이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어 왔고 또 때론 즐겨왔는지…"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여전히 문빠의 미친 짓을 '양념'으로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어쩌면 이런 문빠의 환심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우리 이니 마음대로' 같은 미신 숭배자의 달콤한 말을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이 맛에 빠질수록 자신에 대한 비판에는 치를 떠는 독재자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실제 현 정부나 여당 그 누구도 문 대통령에게 맞서 '이건 옳지 않다'며 딴소리를 못 내고 있다. 문빠에게 찍혀 조리돌림 당할 수 있다고 겁내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제약되고 정당한 비판이 틀어막히는 괴기한 상황이 벌어져 오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빠를 어둠 속 바퀴벌레로 본다. 아주 오래전 서울 강북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세 들어 산 적 있었다. 어느 날 밤중에 목이 말라 전등을 켰을 때 방 안 풍경이 낯설었다. 어둠 속에서 바퀴벌레들이 새카맣게 쏟아져 나와 있었던 것이다. 환한 불빛에는 재빨리 달아나 숨기 시작하던 그 바퀴벌레 떼가 연상될 뿐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20/202002200407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