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4. 9. 07:42ㆍ이슈 뉴스스크랩
[중앙일보 임주리.홍혜진.안성식] 7일 오전 10시 서울 송파구 가락동 가락시장 남문 옆. 과일 행상 김영덕(45)씨가 1t 트럭에서 사과 상자를 내려놓고 좌판을 벌였다. 평소 같으면 손님을 찾아 주택가를 누빌 시간이다. 그러나 이날 그는 차를 움직이지 않았다. “무서운 기름(경유)값 때문에 잘못 움직였다간 적자를 본다”는 설명이었다. “트럭 행상은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게 생명”이라는 것이 경력 20년 김씨의 지론이다. 시시각각 사람이 모이는 ‘목’을 찾아 주택가, 아파트 단지, 지하철역 출구 등으로 옮겨 다녀야 한다.
◇멈춰 선 행상 트럭=치솟은 경유값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김씨의 가계부에 따르면 3월 총 매출은 700만원. 그중 기름값이 70만원에 이르렀다. 경북 청송에서 사온 사과 대금을 빼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200만원에 불과했다. 그는 “지난해엔 한 달 기름값이 45만원 정도였다”며 “올해 들어 한 달 매출은 100만원 정도 줄었는데 기름값은 오르기만 한다”고 울상을 지었다.
매주 두 차례 사과 산지에서 물건을 떼왔던 그는 요즘엔 한 번 다녀오기도 겁난다고 말했다. 왕복 600㎞에 이르는 거리라 기름값만 10만원이 훌쩍 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나온 대안이 ‘감축 운행’. 손님이 비교적 적은 주말 등에는 가능한 한 차를 세워 둔다. 당장 기름값은 줄이겠지만 걱정은 더 커진다. 매출 감소도 문제지만 단골을 잃을 것 같아서다. “트럭 행상은 ‘단골 장사’다. 누가 처음 보는 트럭에서 과일을 사가겠느냐”는 게 그의 설명이다.
좌판을 정리하던 오후 6시, 맛보기로 깎아 놓은 사과는 누렇게 변해 있었다. 한 점 베어 문 그는 “경유는 ‘서민 기름’인데 정부의 대책이 있느냐”며 따지듯 물었다. 7년 전처럼 어엿한 청과물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인 그는 “미대 진학을 준비하는 딸애 학원비를 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트럭 시동을 걸고 떠났다.
◇중고 화물차 가격 하락=치솟는 경유값에 시름하는 건 화물차 운전자들도 매한가지다. 이날 오후 1시 서울 양재동 화물운송터미널 1층 ‘전국 특송’ 대합실엔 화물차 기사 50여 명이 앉아 있었다. 간간이 중개소 직원이 “울산 3시” “광주 4시”라며 새 주문을 외치자 기사 몇몇이 창구로 다가갔다.
그러나 이어지지 않는 주문에 대부분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왔다. 경력 20년의 이승한(59·경기도 군포)씨는 “일감이 준 것도 문제지만 경유값 때문에 손에 쥐는 돈이 적다”고 하소연했다.
서울~울산 간 왕복 운행의 운임은 30만원 선. 요즘엔 기름값만 20만원이 든다. 여기에 고속도로 통행료·알선료·운행 중 식사값을 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이다.
2005년 1500만원을 들여 구입한 1t 트럭의 할부금도 채 갚지 못했다는 이씨는 “등록금을 제때 마련 못해 휴학과 복학을 반복한 대학생 아들이 안쓰럽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치솟는 기름값에 과적도 기피한다. 김덕곤(49·전북 전주)씨는 “화주들이 ‘몇 만원 더 얹겠다’며 과적을 권하면 과거엔 승낙을 했지만 요즘은 기름값이 무서워 거부한다”고 말했다.
기사들은 “일을 그만두는 것도 쉽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시장이 얼어붙어 중고차 시세도 내려갔다. 김모(53·경기도 과천)씨는 “차라도 팔려야 그만둘 텐데 지난해 6000만원에 구입한 5t 트럭이 4500만원에 내놓아도 안 팔린다”며 한숨을 쉬었다.
경유를 사용하는 RV차량 운전자들의 걱정도 태산이다. 공구도매상 박윤기(53)씨는 “지난해 말에 비해 한 달에 10만원 이상 더 들어 배달 나갈 때마다 ‘돈 새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는 “정부가 세제를 조정해 경유값을 잡아 줬으면 한다”고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