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상품표시제 폐지

＃장면 1=2008년 9월 1일. 차를 몰고 퇴근하던 회사원 A씨는 자주 가던 주유소에 들렀다. 예전의 폴 사인(정유사 상표)을 보고 들어갔다. 기름을 넣으려는데 주유원이 “C사와 D사의 기름이 섞인 제품”이라고 알려줬다. 살펴보니 그런 표시가 주유기 귀퉁이에 붙어 있다. 그는 “왜 다른 회사 제품을 같이 판다는 표시를 눈에 띄게 안 했느냐”고 했더니 주유소 직원은 “어떻게 표시하라는 방침이 없다”고 말했다. A씨는 뭔가 속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장면 2=A씨는 어쩔 수 없이 기름을 차에 넣었다. 계산을 하려고 L당 40원씩 싸게 살 수 있는 주유 할인카드를 내밀었다. 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이 카드로는 할인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A씨는 “이 주유소를 찾은 이유가 카드로 기름을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인데 왜 안 되느냐”고 따졌다. 주유소 직원은 여러 정유사의 기름을 팔기 때문에 주유 할인카드를 쓸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다음달 1일부터 주유소 상표표시제를 폐지하기로 했지만 준비가 안 돼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전망이다. 지금은 특정 업체의 폴 사인을 세워 놓으면 그 회사 제품만 팔아야 한다. 하지만 9월부터는 특정 폴 사인을 세워 놓고 다른 회사의 제품을 따로 팔아도 되고, 섞어서 팔아도 된다. 주유소 유통시장에 경쟁을 도입해 기름값을 낮추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시행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없어 소비자들만 혼란스럽다. 일부에서는 기름값을 낮추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한국주유소협회는 24일까지도 기름을 섞어 판다는 알림 글의 크기와 문구 등을 정하지 못했다. 협회 관계자는 “알림 글을 폴 사인이 아니라 주유기에 붙인다는 것만 확정했다”고 말했다.

알림 글을 외부가 아닌 주유기에 붙이면 소비자들은 주유소가 어떤 제품을 파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기름을 구입하게 된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주유소협회의 알림 방법이 소비자 보호 원칙에 어긋나면 고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주유 할인카드 사용에 대해선 정유사들이 완강하게 반대한다.

“여러 제품을 함께 파는 주유소에선 우리 기름을 넣었는지, 경쟁사 제품을 넣었는지 알 수 없는데 왜 할인 혜택을 주느냐”는 것이다. 신용카드사들도 “정유사가 반대하면 할인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주유 카드의 할인금은 정유사와 카드사가 분담한다. 카드 업계에 따르면 주유 관련 할인·포인트 적립카드는 약 2500만 장이 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은숙 소비자시민모임 사무처장은 “정유사가 주유소에 주는 석유제품 값을 내려도 카드 할인이 안 되면 오히려 소비자에게는 손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소비자들이 주유 할인카드를 못 쓰면 L당 40원을 더 부담해야 할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의 한 주유소 사장은 “기름을 섞어 판다는 표시를 어떻게 할지, 할인카드를 계속 쓸지 같은 현안이 해결되지 않아 당장 여러 정유사의 제품을 받아 팔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른 주유소 사장은 “경쟁을 할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 인하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정부가 뾰족한 대책을 내놓기도 어렵다. 민간 기업끼리의 계약이라 정부가 끼어들기 힘든 이유다.

현재 국내 석유제품 시장은 SK에너지·GS칼텍스·S-OIL·현대오일뱅크 4사가 과점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국내 1만2000여 개 주유소 대부분은 이들 4개 사 중 한 곳의 제품만 받아 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