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여성,노무현 세대 동감.

2009. 5. 27. 19:20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을 덕수궁 옆 분향소에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26일 오후 5시경 여고생 김 모양(17)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달려왔다. 자원 봉사 일을 돕기 위해서다. 그가 맡은 일은 국화꽃을 조문객들에게 나눠주는 일.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나라의 어른이 돌아가셨는데,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쏟아진 이들의 상당수는 '젊은 여성'들이다. 덕수궁 돌담길 옆으로 길게 늘어선 참배객들의 면면을 봐도 여성의 숫자가 남성을 훌쩍 상회한다. 덕수궁 앞뿐만 아니라 전국 여러 분향소에서도 마찬가지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어림잡아 조문객의 60~65%가 여성인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20대 초반-30대 초중반의 여성이다. 동영상 뉴스로 잘 알려진 파워 블로거 '미디어 몽구'는 "첫날(23일) 조문객의 60%는 젊은 여성이었다"고 단정했을 정도다.

오전엔 직장인 조문객이 많고 오후에는 가족단위 조문객이 많다고 하지만 여성 조문객의 우위는 슬픔에 빠진 시민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화제가 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친화적 대통령으로 평가 받는다.

● 여성은 정치적 사건에 둔감?

이는 '여성은 덜 정치적이다' '젊을수록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정치판의 통념과 대치되는 현상이다. 게다가 노사모나 과거 열린우리당 당원 중 여성의 비율은 남성보다 한참 낮다. 2002년 제 16대 대선에서 노 전 대통령이 얻은 1200만표에서도 남녀 비율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도 여성 조문객이 두드러지게 많은 까닭은 뭘까.

우선 '비극적 상황에 대한 공감'의 정도가 여성이 훨씬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너무도 드라마틱한 상황 자체가 여성에게 강하게 어필한다는 얘기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30대 여성 이 모 씨는 "그의 정치적 이력이나 업적과 무관하게 비극적 결말에 연민을 느껴 한참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덕수궁 앞에서 만난 적지 않은 2030세대 여성들이 "그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답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태터앤미디어 한영 대표는 "공감 능력이 남성보다 뛰어난 여성들이 최고 지도자의 비극이라는 감성적 이슈 앞에 더 빨리 그리고 더 깊이 반응하는 듯 하다"고 말했다. 이는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성인 남성들은 크게 놀랐다고 하는 반면 여성들은 슬픔을 느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건국대 의대 하지현 교수(정신과)는 관계를 중시하는 여성의 특징에 주목해 이 현상을 바라봤다.

"남성들은 정서적 어려움을 최대한 혼자 감내하려 하고 그도 아니면 블로그에 글을 쓰거나 대화를 통해서 소극적으로 해소하려 하지만, 여성들은 혼자서 감내하기보다 추모하는 장소에 가서 동질성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나처럼 추모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하 교수는 "이런 큰 충격에는 충분한 애도과정을 거치는 것이 최선"이라며 "만일 그러지 못할 경우 슬픔이 분노로 변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봉하마을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 이 가운데 상당수가 20-30대 젊은 여성들이다.[연합]

● DJ나 YS는 군사정권에 저항한 '남성적 이미지'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최초의 여성 친화적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치적 역경에 맞닥뜨렸을 때 아파하는 모습, 혹은 모자라는 모습을 직접 드러내면서 대중과 감정적으로 교류한 '여성 친화적' 지도자였다는 이야기다.

NHN의 김수해 과장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만 해도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 패거리 정치 등으로 남성적 이미지가 강한 지도자였지만 노 전 대통령은 그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고 말한다.

노 전 대통령의 지극한 가족사랑이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해석도 나온다. 가족에게 쏠린 화살을 끌어안고 목숨을 버린 선택이 2002년 민주당 경선 당시 "대통령이 못되더라도 사랑하는 아내를 바꿀 수는 없다"는, 유명한 연설과 오버랩되면서 여성들에게 어필한다는 것.

동영상 검색 사이트 엔써미 이미나 이사(39)는 "평소 부부가 늘 다정하던 모습은 정말 좋아 보였다"며 "그 연배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좋아 보이기도 정말 어려운데 자살하셨다는 점에서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보신당 지지자인 한 30대 여성은 "낮 시간에 대부분의 남성들이 직장에 나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문객 중 여성 비율이 높은 것이 그리 의미 있는 현상이 아닐 수도 있다"고 반박했다.


여성 조문객의 숫자가 남성보다 많은 이유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 20~30대 중반인 70년 이후 출생 세대에게 노 전 대통령이 갖는 상징적 비중은 다른 세대에 비해 크다. 분향소마다 추모 열기를 주도하는 30대 여성들은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대선의 '투표 혁명'을 주도했던 20대 세대였다. 특히 '지역주의 타파'나 '패거리 정치 거부' 심지어 남성에 유리한 학벌주의 극복까지 노 전 대통령이 내건 기치는 젊은 세대에게 '새 시대'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덕수궁 앞에서 만난 한 30대 초반의 추모객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자신의 슬픔을 표현했다.

"1960년대 출생 세대를 빗대 '이소룡 세대'라고들 하잖아요. 우리 70년대산 세대는 신세대이기도 하지만 '노무현 세대'라는 별칭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소룡의 죽음과 노무현의 죽음이 각각의 세대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각인되어 버렸으니까요."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