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수사관행 개선

2009. 5. 27. 17:35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 2009-05-27 ]

"검찰 수사관행 개선" 한 목소리

브리핑 통해 피의사실 언급… 언론서 확대 재생산
법원의 확정판결전 피의자 유죄추단으로 치명적 상처 입혀
법조계, 피의자 권리·국민 알권리 사이 접점찾기 대책 촉구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절벽에서 투신, 서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검찰을 비롯한 법조계가 충격에 빠졌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검찰의 수사관행과 무분별한 언론보도행태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게 일고 있다. 기소도 하기 전에 언론 브리핑 등을 통해 피의사실을 언급하거나 수사와 관련된 내용을 언론에 흘려 보도하게 한 검찰의 수사관행이 노 전 대통령 서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특히 검찰의 피의사실과 관련된 언급들을 특종경쟁을 벌이는 언론이 확대 재생산하면서 국민들로 하여금 법원의 확정판결이 있기도 전에 피의자의 유죄를 추단하게 만들고 회복불가능한 낙인을 찍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는 헌법상 무죄추정 원칙을 받아야 할 피의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형법상 피의사실공표죄에 해당할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에따라 검찰 수사단계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해 변호인들로 하여금 피의자측의 주장을 언론에 적극적으로 알려 보도의 공정성을 도모하는 등 피의자의 권리와 국민의 알권리 사이의 절충점을 찾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 법조계, “검찰 수사관행 선정적 언론보도 문제”= 법률전문가들은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참극이 빚어지자 검찰의 수사관행과 선정적 언론보도를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하태훈 고려대 교수는 “검찰이 기소를 하기도 전에 피의사실에 해당되는 내용을 브리핑 형식으로 공개하고 여기에 언론이 취재내용을 덧붙여 확대보도하면 이를 보는 국민들은 법원의 판결이 있기도 전에 유죄의 심증을 갖게 된다”며 “추측성 보도가 난무한 이번 사건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강조했다. 하 교수는 “검찰의 피의사실공표가 국민의 알권리라는 이유로 정당화되려면 기소 후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경우에 한해 공식절차에 따라서 한 사실발표에 한정돼야 한다”며 “이같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무죄추청의 원칙에 위반됨은 물론 형법상 피의사실공표죄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라고 지적했다.

노명선 성균관대 교수도 “이번 사건처럼 검찰 수사내용이 자세하게 보도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연일 수사내용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고 명품 시계를 버렸다는 등 혐의 입증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내용까지 보도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과연 이것이 (검찰총장이 말한)품격있는 수사인가?”라고 되물었다.

중견로펌의 한 변호사도 “언론이 검찰 등 권력기관의 감시기능을 도외시한채 일방 당사자의 주장내용에 해당하는 검찰의 브리핑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이를 확대해 흥미위주의 선정적 보도를 함으로써 피의사실공표의 공범형태가 됐다”며 “검찰과 언론의 자성이 필요한 때”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언론관계법에 정통한 한 교수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검찰의 수사관행과 언론의 보도행태 및 이에 익숙한 국민들의 정보습득행태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노 전 대통령 본인이 법조인일 뿐만 아니라 문재인 변호사 등 다른 법률가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행동했고 그의 주장이 홈페이지와 언론을 통해 모두 국민들에게 전달됐다”며 “검찰이 다른 피의자들과 달리 이번 사건에서만 심한 언론플레이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 선진외국은 엄격한 기준 아래 수사사건 브리핑= 선진외국의 수사기관은 수사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브리핑을 하지 않거나 예외적으로 브리핑을 하더라도 엄격한 기준에 따라 실시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연방검사업무지침에 ‘대언론관계’라는 제목으로 17개 항목에 걸쳐 브리핑의 한계와 시점, 주의사항 등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이에따라 피의자나 피고인의 범죄경력은 언론에 공개가 금지되고, 기소시 발표하는 보도자료에도 ‘기소범죄사실은 단순한 혐의에 불과하며 재판확정시까지 무죄로 추정된다’는 점이 명시되고 있다. 공보관에 의한 언론창구 단일화로 인터뷰 승낙을 받지 않으면 기자와 해당 검사의 직접 접촉이 차단되며 기자실이나 상주기자도 없다.

독일도 대변인을 통해서만 취재가 가능하고 기자의 검사실 출입이 금지된다. 수사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브리핑을 하지 않는다. 테러등 사회이목이 집중된 사건에 대해 유언비어 유포방지 목적으로 확실히 규명된 범위내에서만 브리핑이 이뤄질 뿐이다.

일본은 종합적인 지침은 없지만 도쿄지검의 경우 수사검사나 직원을 대상으로 한 취재는 일체금지시키고 기자의 검사실 출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각종 영장의 열람도 허용되지 않으며, 정례브리핑 역시 오보를 막기 위한 수준에서 최소한의 범위내에서 이뤄진다.

◇ 법조계 ‘피의자 인권-국민 알권리’ 절충점 찾아야= 이에따라 법조계에서는 피의자의 권리와 국민의 알권리 사이의 적절한 절충점을 찾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법대교수는 “이번 사태는 검찰만의 문제가 아니라 검찰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고 선정적 보도를 일삼는 언론의 관행과 이에 익숙한 국민들의 정보습득행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구속수사원칙을 확립해 구속된 상태에서 검찰의 일방적인 주장만 나오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특히 피의자측의 언론에 대한 접근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 검찰 수사단계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충분히 보장해 이들 변호인으로 하여금 언론에 피의자측의 주장이 제대로 전달돼 보도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태훈 고려대 교수는 “피의사실 공표에 해당된다고 하더라도 피의자측이 수사검사 등을 고소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검사가 자신이나 동료가 관련된 내용을 기소할리도 만무하고 재정신청제도가 있긴 하지만 ‘죄지은 사람이 무슨 권리를 행사하느냐’는 식으로 매도당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언론과 검찰의 자성을 촉구할 수 밖에 없어 답답하다”며 “피의자의 권리와 국민의 알권리 사이에서 적절한 접점을 찾아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재홍 기자 nov@law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