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신발할인백화점

2009. 6. 16. 08:47분야별 성공 스토리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우린 행복"

오마이뉴스 | 입력 2009.06.15 15:23

 

[오마이뉴스 김갑봉 기자]
부평시장은 전국에서 그 규모가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로 유명한 시장이다. 오늘날 부평시장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20여 년 전이다. 산업화와 더불어 이농층이 대거 일자리를 찾아 부평으로 몰려들면서 부평시장은 규모가 커졌다. 몸뚱어리 말고 가진 게 없어도 열심히 살면 내 집 마련의 꿈이 실현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대형마트와 SSM(기업형 슈퍼마켓) 등 대형유통자본의 지역상권 잠식과 경제 불황 지속으로 부평시장 역시 예전과 같지 않다.





▲ 부평종합시장 남편 오윤찬(55)씨가 가려던 손님을 붙잡고 "깎아주면 되지 신발은 사가야 한다"며 신발을 꺼내고 있다.

ⓒ 김갑봉


가게 얻고 먹고 살수 있어 행복

오윤찬(55)·손용숙(51) 부부는 부평종합시장 안에서 신발가게를 한다. 간판도 없다. 가게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신발만이 이 가게가 신발가게임을 알려주고 있다. 남편 오씨가 "우리 가게의 공식 명칭은 신발할인백화점"이라고 해서야 비로소 가게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부부가 이곳에서 장사한 기간은 10여 년에 불과하다. 부평시장에서 이정도 경력이면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처지지만 그들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고향 함양을 떠나 무작정 상경한 오씨는 아내 손씨를 부평구 산곡동에 있었던 전남방직(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모)에서 일할 때 만났다. 그 뒤 큰형이 하던 건강 침구류 일을 함께 하면서 94년 삼풍백화점 붕괴와 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질 때까지 이른바 '한 때 잘나갔던' 시절을 보냈다.

오씨는 "침구류사업이 잘 돼 삼풍백화점 1층에 입점해 있었는데 어느 날 그야말로 날벼락처럼 갑자기 붕괴됐다. 그때 아내는 붕괴 3일 전까지 일했고 난 다른 곳에서 일보고 있었고 직원 2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그 중 1명은 간신히 살아남고 1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며 "그 뒤 이어터진 외환위기 때문에 빚만 떠안고 인천으로 다시 내려왔다"고 말했다.

어렵게 마련한 집에서 이 궁리 저 궁리하던 오씨는 우연찮게 신발 판매광고를 접했다. 그는 "광고를 보니 신발을 가져다 팔면 30%의 마진을 준다는 거였다. 먹고는 살아야겠고 사업정리 뒤 봉고차는 남았으니 싣고 다니면 되겠구나 하고 이 일을 시작했다"고 들려줬다.

오씨는 그렇게 98년 봄에, 자신의 봉고차에 신발을 담은 박스 대여섯개를 싣고 인천은 물론 서울과 경기도까지 물건을 팔러 다녔다. 노점상에서 다시 출발키로 한 것. 도시락을 싸가지고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게 그의 하루였다. 그러던 중 현재 신발가게가 그의 눈에 들어 왔다.

그는 "여기다 싶었다. 지금도 보면 동서약국으로 해서 내 가게 앞으로 해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열심히 돈 벌어서 꼭 저 가게 들어가야겠다고 맘먹었다"고 말했다. 봉고차로 열심히 돌아다닌 덕분에 주변사람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부부는 1년 뒤 그 가게에 신발가게를 냈다.





▲ 신발할인백화점 아내 손용숙(51)씨가 손님에게 운동화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가게를 처음 낼 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둘이서 100만원만 벌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 김갑봉


아내 손씨는 "남편이 그 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00만원만 벌자고 했다. 월세 내고 전기세 내고 아무튼 100만원만 벌자고…. 다들 어려운 시기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 우린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랬다. 사정을 이해해준 건물주인도 워낙 좋으셨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그렇게 시작한 부평시장 내 동서약국 길목 앞 신발할인백화점은 10년 동안 매년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지금은 하루매출이 50만원 내외다. 이 돈이 작다고 하면 한 없이 작은 돈이지만 월 100만원만 벌자던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값지고 큰돈이다.

이들 부부가 나름의 성장을 이룬 데는 그들만의 철저한 원칙이 있다. 우선 고객들과 절대 안 싸우는 것이고, 다음은 손해를 보더라도 자신들이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웃음으로 고객들을 대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부부의 천성이라고 할 수 있는 낙천과 낙관이 배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게를 찾은 한 아주머니가 비싸다고 하자 오씨는 "신발을 사러 왔으면 신발을 사가야죠. 비싸면 내가 깎아주면 되지" 하면서 웃음을 얻어낸다.

그는 "우리 가게를 찾는 고객의 95%는 50대 이상"이라며 "항상 웃는다. 요즘엔 신발 안 사도 쉬어가라고 의자도 내주고, 음료수도 주고 그런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무슨 고객 관리대장 같은 게 있겠냐? 그저 오는 사람들 꼬박 꼬박 기억해서 '이 신발은 지난번 사갔는데 오래 신어도 돼요'라든가 '본드로 붙여줄 테니 이런 신발 있으면 더 가져 오세요' 그런다. 그랬더니 보따리에 싸들고 온 고객도 있었다. 아마 신문에 나가면 더 많이 올려나 모르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부부가 똑같이 그렇게 몇 년 하다 보니 어느새 단골이 생겼고, 그 단골들이 '약국 앞 친절한 아저씨네'라고 입소문 퍼트리고 다니면서 간판도 없는 신발할인백화점은 오늘날에 이르렀다.

매일 같이 아침 6시 반에 문을 열고 저녁 7시반이면 칼 퇴근이다. 이 역시 부부의 장사약속 중 하나다.

그는 "아침 일찍 문 여는 것은, 시장에 식자재 사러오는 분들이 많은데 그 분들이 일할 때 필요한 장화나 슬리퍼를 꼭 그 시간에 사간다"며 "칼 퇴근 하는 것은 나도 직장인처럼 내일에 충실하면서 일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하자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는 또 "예나 지금이나 돈이야 항상 많으면 좋지만 크게 욕심 안 내는 성격인데 2년 전 큰 수술을 했다. 그 뒤 더욱 주변을 돌아보게 되면서 단골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이 고맙게 느껴졌다"며 "힘이 부치는 날까지 이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겠다. 그래서 요즘은 신발 진열장을 백화점(?)답게 좀 더 세련되게 투자할 고민도 하고 있다"고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