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지 세탁’ 갈수록 교묘

2009. 10. 8. 08:07이슈 뉴스스크랩

‘원산지 세탁’ 갈수록 교묘…검증 쉽잖아 소비자 ‘골탕’

 오관철기자 okc@kyunghyang.com
ㆍ중국산 보온병·안경테, 일본·홍콩산 둔갑

회사원 박모씨는 올해 초 롯데백화점에서 ‘메이드 인 재팬’으로 표기된 ‘피코크’ 보온병(2ℓ짜리)을 샀다. 아이가 사용할 보온병이어서 고민 끝에 일본산을 샀다.

그러나 한 달 뒤 박씨는 일본 방문 도중 똑같은 제품이 ‘메이드 인 차이나’로 표기돼 국내보다 싼 가격에 팔리고 있는 사실을 목격했다. 박씨는 “일본의 지인에게 물어보니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피코크’ 보온병을 중국산 저가 제품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산 보온병 원산지 확인 과정, 원산지 허위 관련 소비자 상담 건수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이 이 같은 제보를 접수한 뒤 일본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로 팔리고 있는 제품이 중국이 원산지라는 사실을 확인하기까지는 약 5개월이 걸렸다. 그만큼 확인 절차가 까다로웠던 셈이다. 결국 공정거래위원회와 관세청, 지식경제부 등 관련 부처의 조사 과정에서 문제의 보온병은 ‘스테인리스 용기’를 중국에서 수입한 뒤 일본에서 진공검사와 중간마개, 뚜껑 등을 마감처리해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 7월17일 “스테인리스 용기가 보온병의 주기능 역할을 하며, 총 제조원가 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며 ‘피코크’ 보온병의 원산지를 중국으로 최종 판정했다. 그러나 해당 제품은 롯데쇼핑, 11번가, CJ몰, GS숍 등에서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일본산’으로 둔갑해 수십만개가 팔린 상태다. 일본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4만2000원대인 제품이 국내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5만4000원대에 판매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중국에서 생산된 안경테를 홍콩으로 보낸 뒤 안경테 왼쪽다리 밑에 ‘메이드 인 홍콩’으로 원산지를 허위표시해 국내에 반입하려다 대구 세관에 적발된 사례도 있었다. 또 중국산 의류를 국내에 수입해 원산지를 한국으로 신고한 뒤 독일로 수출하려던 업자가 적발되기도 했다.

이처럼 ‘원산지 세탁’이 갈수록 교묘해지면서 소비자들의 피해가 늘고 있다.

그러나 대형 유통업체들의 원산지 표시 검증장치가 미흡하고, 원산지 허위 표시 제품을 팔다가 적발돼도 처벌은 미미한 실정이다.

7일 공정위가 내놓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4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원산지 허위 표시로 제재한 건수는 30건에 불과했다. 그나마 경고가 24건으로 가장 많았고, 시정명령 3건, 시정권고 2건이었다. 과징금 부과는 단 1건에 그쳤다. 같은 기간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원산지 허위 관련 소비자 불만 건수는 762건이었으나 피해구제는 32건에 불과했다.

원산지 허위표시 여부는 수입면장과 원산지 증명서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교묘한 ‘원산지 세탁’은 사실상 적발이 어려운 상황이다. 유원일 의원은 “공정위는 원산지 허위 표시에 대해 직권조사가 아닌 신고에 따른 조사만 하고 있는 데다 처벌도 미미한 수준”이라며 “원산지 허위표시에 따른 소비자 피해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만큼 공정위의 직권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관철기자 okc@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