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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명문대 보내고 싶다고? 그런데 왜 창의력 얘기를 해요?” 찬물에 머리 감듯 정신이 번쩍 났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명문대 합격과 창의력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진정한 창의력’은 모방이 아니라 ‘나만의 인생’을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것. 삶에서 만나는 무수한 수수께끼를 덮어둔 채 만들어진 가치만 답습한다면 ‘좀비’에 불과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거침없이 본인의 행복을 좇을 수 있는 용기. 창의력은 선택이 아니라 아이들이 하루하루 설레는 삶을 살게 하는 본령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우리 아이는 명문대 출신이다’ 등 자랑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실제로 다녀보니까 특별한 게 없거든.(웃음) 또 장관이 되니까 남들은 멋지다지만, 책임질 일만 많고 그것처럼 하기 싫은 게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 출세했다’ 등 주위의 평에 우쭐해서 ‘행복한 체’하죠. 이는 남들이 만든 가치에 의존한 행동입니다. 창의력이 없다면 타인의 인생을 사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낱말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얘기하는 이어령(75) 전 문화부 장관. 칠순이 훌쩍 넘은 나이건만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쩌렁쩌렁했다. 20대 젊은 나이에 이례적으로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발탁, 대학 교수와 각 기관의 자문위원,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평론·희곡·시·수필 등 분야를 넘나드는 방대한 저서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혁혁한 업적을 자랑하건만, 좀처럼 도전을 멈출 줄 모른다. 도리어 창조적인 ‘무엇’을 만들어내는 게 휴식이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최근 경기창조학교 초대 명예교장을 맡은 그의 요즘 화두는 ‘창의력’. 경기창조학교는 창조적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데 중점을 둔 온·오프라인 통합 교육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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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원’이 아닌 ‘온리 원’이 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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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동안 똑같은 교과 과정을 배운 뒤 대학에 입학하고, 또 취직하고…. 기찻길처럼 주어진 궤도를 안전하게 달리고 때론 정해진 역에서 쉬는 것. 이런 인생이 해답이라면 얼마나 편해요. 그런데 삶은 꼼꼼히 계획을 해도 언제 빨간 불을 만날지 예상할 수 없잖아요. 종전 지식과 정보만으로 곳곳에 산재한 어려움을 풀기엔 역부족입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힘이 있어야 각기 다른 난관들을 헤쳐 나갈 수 있어요. 날마다 마주하는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간 총계가 바로 인생입니다.” 이어령 전 장관은 ‘창의력 지수가 몇 점이다’ 등의 말을 극도로 경계한다. 창의력에는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 당면한 문제를 남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창의력’이다. “저는 넘버원이 아닌 온리 원, 즉 ‘유일자’가 되라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남과 똑같은 데서 1등 하지 말고, 본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라는 소리죠. 360도로 열린 공간에서 제각각 서로 다른 각도로 뛴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럼 다 1등이잖아요? 잘나든 못나든, 가치가 어떻게 바뀌든지 다른 이와 대체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소중한 겁니다.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이것만 깨우쳐도 아이들은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아요.” 그러나 창의력을 키운다고 모두 천재가 된다는 착각은 금물이다. 이어령 전 장관은 세속적인 기준에 맞춰 아이를 키우고 싶다면 창의력 교육에 대한 욕심은 접으라고 충고했다. “부모라면 누구나 아이를 비범하게 키우고 싶죠. 하지만 천재는 1만 명 중 한 명이 나올 둥 말 둥 합니다. 모든 사람이 스티브 잡스고 빌 게이츠라면, 그 사회는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럼 왜 창의력을 키워야 하냐고요? 평범한 일을 하더라도 창의성이 있는 사람은 삶의 주인으로 즐겁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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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만의 창조적인 관점이 세계 경쟁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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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부모라면 뭔가 눈에 보이는 결과를 원할 터.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회적 잣대로 통용되는 산물이 없는 상황에서 자녀 인생을 무작정 맡길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제가 흔히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어쩜 그렇게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가’입니다. 방법은 간단해요. 본인의 중심, 관점이 있으면 됩니다. 자동차, 문학, 디자인, 건축, 음식, 바이오 등 영역은 다양하지만 생각의 근원은 동일하거든. 책 속의 지식 혹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만 토대로 한다면 앵무새처럼 남이 한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어요. 관점이 제대로 확립했다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요즘도 제가 각 분야의 석학들이 모인 국제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할 수 있는 건, 그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한 얘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바이오 전문가들 앞에서 평론가인 제가 방대한 바이오 지식을 자랑한다면 얼마나 우습겠어요. 저만의 얘기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동을 하고 경쟁력이 있는 거죠. 중요한 건 지식이 아닙니다.” 이어령 전 장관은 발상의 전환을 다룬 책 〈생각〉,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감성이 결합한 〈디지로그〉, 일본 문화론 〈축소 지향의 일본인〉, 거리의 말로 한국의 문화를 풀이한 〈뜻으로 읽는 한국어사전〉 등 여러 영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을 일깨워왔다. 특히 1980년대 초에 쓴 〈축소 지향의 일본인〉은 요즘도 일본의 대학 입시 국어 문제에 등장할 정도. 창조적인 관점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다는 진리를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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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창의력은 ‘물음표’에서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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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장관은 생각이 굳은 기성세대가 어떻게 자녀의 창의력 교육을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항상 의문을 가질 수 있도록 지적 감수성이 풍부한 가정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원자시계 개념을 최초로 발견해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에게 기자들이 비결을 물었어요. 이지도어는 모두 ‘어머니’ 덕분이라고 대답했죠. 우리는 흔히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선생님 말씀 잘 들었니?’라고 말하잖아요. 하지만 이지도어의 어머니는 ‘오늘은 학교에서 뭘 물어봤니?’라고 물었대요. 실제로 배움은 질문을 하고, 그 의문을 풀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대로만 기억하면 창의력을 기를 수 없어요. 창의력은 항상 의문부호에서 나옵니다. 때문에 아이들의 지적 감수성을 돋우는 가정환경이 중요합니다.” 이어령 전 장관은 본인은 특별한 사람도, 천재도 아니라고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쟁 등으로 먹고살기 힘든 시기에도 지적 감수성을 끊임없이 자극한 ‘어머니’의 존재라고. “제가 문학인이 된 건 어머니 영향이 큽니다. 어머니는 책을 무척 좋아하는 문학소녀였어요. 책이 바닥에 놓여 있으면 절대 밟지 않고 돌아가고, 지식이 쏟아진다고 책을 엎어놓지도 못하게 하셨죠. 그만큼 책을 사랑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유년 시절 저에게 수많은 책들을 읽어주셨어요. 다섯 형제에게 누가 빨리 읽는지 속독 경주도 곧잘 시켰죠. 저에겐 그런 것들이 다 놀이고, 즐거움이었습니다. 또 대학생, 고등학생인 형님들 어깨너머로 영화, 미술 등 수많은 지식들을 참 재미있게 들었어요. 이런 것들이 쌓여 제가 독창적인 삶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죠. 이처럼 늘 아이의 지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가정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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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보다 항상 반 발자국 뒤에 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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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장관은 또 “과보호는 자제하라”고 했다. 아이들은 때론 실수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기 때문. 자녀가 생각하기도 전에 부모가 나서 문제를 해결하면 어떠한 호기심도 가질 수 없다. 아이들보다 반 발자국 뒤에서 따라가는 지혜를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저는 물론 아내도 대학 교수다 보니 바빠서 공부하라는 등 잔소리를 할 틈이 없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과보호를 하지 않았죠. 다행히 3남매 모두 스스로 자기 앞길을 찾았어요.” 아이들은 살짝 질투가 날 정도로 잘 자랐다. 고등학생 때 전국 1, 2등을 다투던 맏딸은 미국에서 검사, 변호사를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인 둘째 아들은 영화감독 데뷔작 〈전사의 길〉로 할리우드 진출을 앞두고 있다. 〈전사의 길〉은 미국과 뉴질랜드, 한국 자본이 결합한 다국적 프로젝트로 영화 〈반지의 제왕〉의 베리 오스본이 제작한다. 막내아들은 지방의 한 대학 조형학과 교수다. “자랑은 아니지만 맏딸은 장안이 떠들썩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어요. 오히려 밑에 두 아들이 누나한테 치여서 빛을 보지 못했죠. 그런데 맏딸은 지금 수많은 지식을 하나도 쓰고 있지 못하잖아요. 하루는 딸이 ‘아버지, 만약 시험 치는 걸로 대통령을 뽑았다면 나는 출세했다. 미국에서도 자신있다’며 우스갯소리를 합디다. 반면 두 아들은 유년 시절 누나에 비해 다소 뒤처져 보였어도 결국 본인들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어요. 다들 불가능이라고 했지만, 둘째는 본인이 쓴 시나리오를 베리 오스본에게 보여준 뒤 그 자리에서 ‘오케이’ 사인을 받았죠. 인생은 시험 점수에 따라 천편일률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맏딸은 암에 걸리고, 실명 위기를 겪은 뒤(다행히 요즘은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됐다. 당시 어어령 전 장관은 딸의 병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본인을 발견했다. 화려한 유명세나 지위도 아무런 소용이 없음에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고. 1970년대 ‘신과 인간’ ‘영성과 이성’ 등의 주제로 기독교계와 격렬한 논쟁을 벌인 그가 신자가 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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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성에 젖어 관성으로 사는 것은 싫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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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장관은 젊은 시절 별명(붓 깡패)이 무색할 정도로 한결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붓 깡패는 새파랗게 젊은 시절 붓 한 자루 들고 깡패처럼 문단을 휘젓고 다닌다고 선배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이어령 전 장관은 약관의 나이에 김동리, 서정주, 염상섭 등 대작가를 비판하는 등 당시 지성계에 큰 충격을 던진 바 있다. 기성세대를 우상으로 규정, 우상 파괴를 외치던 그는 ‘화전민 의식’을 주창하며 날카로운 일침을 가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서운 소리지. 전통, 권위를 무시한 채 문단을 깡그리 불태워서 새로운 내 길을 창조하겠다니…. 남들을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온리 원’이 되겠다는 의식의 발로였죠. 덕분에 남들보다 빨리 사회에 나오고 자리도 잡았지만, 외톨박이에 적도 많았어요.” 이어령 전 장관은 반복하는 삶이 싫다고 했다. 타성에 젖어 관성으로 살아가는 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다고. 때문에 그는 요즘도 새로운 도전에 목마르다. 최근 경기창조학교 일을 맡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이 학교는 인문학, 문학, 과학, 예술, 경영 등 각계 전문가들과 함께 멘토링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게 특징. 서울대 김병종 교수, 소설가 박범신 등 멘토(조언자)가 온·오프라인을 통해 멘티(조언을 받는 사람)를 교육한 뒤 다시 멘티가 멘토로 거듭나는 식이다. 원론적인 이론보다는 그때그때 이슈가 되는 뉴스나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면서 창조적 영감을 충족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특별한 자격 조건이 없어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다. 입학시험을 치를 필요가 없는 건 물론, 등록금이나 졸업장도 없다. “하루는 아내가 농담 삼아 ‘당신은 매일 새로운 것을 찾고 반복을 싫어하는데 어떻게 한 여자랑 50여 년을 살았어’라고 말합디다. 생각해보니 나도 이상하데. 하하하. 여자 관계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길을 찾는 스릴에 푹 빠져 살아온 거 같아요. 남들이 보기엔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같아도 제 마음속에선 늘 폭풍이 일죠. 주위 사람들이 ‘좀 쉬라’고 하지만 저에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노동이고 곧 죽음입니다.” 그는 요즘도 새벽 2, 3시까지 책을 읽고 집필 활동을 한다. 늘 분, 초를 쪼개 일을 하는 아버지를 보고 수험생 시절 아이들은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단다. 본인들이야 대학 입시 시즌에만 새벽까지 공부하면 되지만, 아버지처럼 평생 하는 건 싫다고. “그만큼 애들이 보기에 아버지가 각박하게 살았나 보죠? 저는 배고픈 시대에 태어나 좁은 땅에서 아등바등 경쟁을 해서 살아남았다면, 요즘 아이들은 달라요. 본인이 좋아하는 삶을 사니까 저보다는 훌륭한 인생을 만들어가는 셈이죠. 아이들과 비교하면 저는 실패한 사람인지도 몰라요. 제가 자갈밭 등 거친 땅에서 캐낸 울퉁불퉁 꼬인 무라면, 아이들은 부드럽고 기름진 토양에서 자란 말쑥한 무죠. 우리 미래를 이끌어갈 아이들은 말쑥한 무처럼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창의적인 사고를 하면 ‘나’는 물론 현실, 가족, 사회, 나라가 변한다고 했다. 세상의 참된 의미와 본인의 창의력을 결합할 때 상상도 하지 못한 패러다임이 펼쳐진다고. 허기진 자가 밥을 찾듯 지적 억압이 해체된 사회를 갈망하는 세상. 그는 앞으로 어떤 창의적인 인재를 만날지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고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이라 불린 지 오래인 이어령 전 장관.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은 아직도 삶의 갈증을 다 풀지 못한, 열정으로 가득 찬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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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1934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단국대학교대학원 국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화여대 문리대 교수, 초대 문화부 장관,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서울신문·한국일보·경향신문·중앙일보 논설위원,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제3회 제주세계델픽대회 명예고문 등을 역임했다. 최근엔 경기창조학교(www.k-changeo.org) 명예교장을 맡았다. 대표 저서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등이 있다. 제2회 한민족문화예술대상 문학 부문상, 제4회 마사오카 시키 국제 하이쿠상, 제48회 대한민국 예술원상(문학 부문) 등을 수상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