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이 ‘경쟁력’ 좌우…

2009. 12. 21. 09:19C.E.O 경영 자료

수학이 ‘경쟁력’ 좌우…‘러브콜’ 잇달아
각광받는 수학 전공자들
파생상품 시장이 커지면서 고도의 수학적 능력을 갖춘 금융 퀀트의 몸값은 더욱 치솟고 있다. 국내 1세대 퀀트인 서승석(왼쪽) 한국투자증권 투자공학부장
인류의 가장 오랜 학문인 수학이 최근 기업에서 각광받고 있다. 이런 변화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거대한 디지털 산업의 기초는 다름 아닌 0과 1로 이뤄진 수학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성공한 디지털 리더 중에는 수학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은 하버드대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학과로 전과할 정도로 수학에 대한 관심이 유별났다. 야후의 창업자인 제리 양은 영어 한마디 못하는 이민자 출신이었지만 뛰어난 수학 실력으로 주변을 압도했다. 고교에서 퇴학당한 넷스케이프의 창업자 짐 클라크도 수학 강사로 재능을 발휘하면서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어려운 수학 문제 풀어야 채용

하지만 수학 자체를 기업의 경쟁력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은 바로 구글이다. 구글(Google)은 회사 이름도 10 을 뜻하는 구골(Googol)에서 따왔다. 수학은 세계 최고의 인터넷 기업인 구글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는 핵심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구글은 회사 차원에서 순수 수학에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실리콘 밸리 도로변과 기술 잡지에 어려운 수학 문제를 내 이를 푼 사람을 찾는 독특한 채용 방식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수학은 검색 서비스를 주력으로 하는 이 기업의 핵심 경쟁력이다. 검색의 정확성은 정교한 수학적 알고리즘에 전적으로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신용카드 회사 캐피털원은 아예 수학 실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뽑는다. 이 회사는 지원자들의 수학적 분석 능력을 판별할 수 있는 다양한 시험 방식을 도입해 활용한다. 입사 지원자들은 수차례 인터뷰와 실제 문제 풀이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만 한다. 이런 기준은 신입 사원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캐피털원의 고위 경영진이 되려면 가장 먼저 수학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1995년 설립된 이 회사는 최첨단 통계 기법을 활용해 카드 시장을 정교하게 분할해 공략하는 전략으로 불과 10년 만에 미국 신용카드 시장의 ‘빅4’로 급성장한 곳이다.

수학 인재의 인기가 치솟기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금융공학의 부상과 함께 수학 전공자들을 대거 채용하고 있는 금융권이 대표적이다. 과거 수학과 출신들은 보험사에서 계리사(計理士)로 활약하는 게 고작이었다. 보험 상품은 미래의 보험금 지급 확률을 정확하게 계산해 보험료 등을 결정해야 한다. 상품 설계가 잘못될 경우 자칫하면 회사문을 닫아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계리사는 보험금 지급을 위해 보험료의 얼마를 비축해 두어야 하는지 계산하거나 보험 상품을 설계하는 일을 주로 한다.

그러나 요즘은 은행과 증권사에서 수학 전공자를 더 선호한다. 서승석 한국투자증권 투자공학부 부장은 “2004년 말에서 2005년 초 주가연계증권(ELS)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시작된 변화”라고 말했다. ELS는 개별 주식이나 주가지수에 연계돼 수익률이 결정되는 금융 상품으로 선물·옵션 등 금융파생상품을 활용해 설계된다. 초기에는 외국계 금융사가 만들어 놓은 상품을 받아다 파는 정도에 머물렀다. 하지만 시장이 커지면서 자체 ‘생산’에 나서게 됐고, 이를 위해 고도의 수학 능력을 갖춘 전문가들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들은 보통 ‘퀀트(Quant)’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수학 박사 출신인 서 부장은 2004년 말 금융권에 뛰어든 1세대 퀀트에 해당한다.

서 부장이 이끄는 퀀트팀은 박사 4명, 석사 1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2명이 수학 박사다. 다른 증권사도 3~4명 규모의 퀀트팀을 두고 있다. 은행권은 기초자산별로 영역이 세분화돼 있을 만큼 규모가 더 큰 편이다. 퀀트는 억대 연봉을 받을 수 있고 미래 비전도 밝아 수학 전공자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꼽힌다. 지난해 한국투자증권에서 퀀트 1명을 뽑는데 지원자가 30명 이상 몰렸다.

금융공학 첨병 ‘퀀트’ 활동 영역 넓어져

‘한국금융공학포럼’을 운영하고 있는 한화증권 홍창수 금융공학팀 차장은 “퀀트의 활동 영역은 금융권 전 분야로 확대돼 나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재 퀀트는 ELS 등 파생상품을 설계하는 ‘프런트 오피스 퀀트’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외국의 경우 퀀트는 크게 5종류로 나뉜다. 프런트 오피스 퀀트 외에 이들이 사용하는 모형이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는 모형 확인 퀀트, 현재 사용하는 모형보다 더 좋은 모형이 있는지 찾아보는 연구 퀀트, 여러 모형의 프로그램화를 돕는 퀀트 디벨로퍼, 가격 움직임에서 일정한 패턴을 발견하고 이를 기초로 자동화된 매매를 구상하며 수익을 내는 통계 아비트리지 퀀트 등이 있다. 이 밖에 굳이 파생상품과 관련된 분야가 아니라도 수학적 방법론을 필요로 하는 금융 영역은 적지 않다.

수학은 기업 경영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효율적인 자원 계획에서 인력 배치, 최적 공급망 설계까지 수학적 방법론은 폭넓게 활용된다. 세계 최대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은 고객 개개인의 과거 소비 내역을 통계와 인공지능 이론을 결합한 데이터 마이닝 기법으로 분석해 맞춤형 광고 메일을 발송한다. 글로벌 유통 기업인 월마트는 매장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물류센터의 재고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해 언제 어디서 어떤 물건을 어떻게 수송할 것인지 수학적 최적화 방식으로 결정한다. 디지털화된 정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고성능 컴퓨터와 복잡한 수학적 방법을 동원한 데이터 분석은 이제 기업 경쟁력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지문 인식 기술 업체인 슈프리마는 수학적 아이디어로 성공을 거둔 벤처기업이다.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에서 지능형 차량 시스템을 연구하던 이 회사 이재원 사장은 지난 2000년 창업해 기술 용역을 주로 하다 우연히 지문 인식 기술의 시장성에 눈을 떴다. 지문 인식 알고리즘의 핵심은 센서와 영상을 통해 지문 정보를 받아들여 이미 등록된 것과 같은지 수학적으로 계산해 내는 것이었다. 수학이라면 무엇보다 자신 있던 이 사장은 브랜드 파워나 마케팅 능력을 뒤졌지만 기술력 하나로 세계시장을 파고들었다. 회사명 슈프리마도 수학 용어 ‘슈프리멈(supremum)’에서 따왔다. 슈프리마는 국제 지문 인식 경영 대회에서 2회 연속 1위를 차지하면서 해외시장에 이름을 알렸다.


돋보기수학과 출신 CEO 누가 있나

논리적 사고 강점…금융권서 두각

이덕훈 전 우리은행장
김순환 동부화재사장
수학은 흔히 ‘학문의 언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수학 전공자들은 어떤 분야에서도 쉽게 적응하는 유연성을 발휘한다. 복잡한 현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결론을 도출해 나가는 논리적 사고에도 남다른 강점을 보인다. 국내에도 두각을 나타내는 수학과 출신 최고경영자(CEO)가 적지 않다. 특히 금융권에서 활약이 두드러진다. 미국 퍼듀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덕훈 전 우리은행장은 서강대 수학과 출신이다. 그는 유학 시절 외국인 학생들에게 ‘수학 개인교사’로 통했다고 한다. 박해춘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연세대 수학과를 졸업했다. 박 전 이사장은 서울보증보험 사장과 LG카드 사장, 우리은행 행장을 차례로 거치며 ‘구조조정의 마술사’로 불렸다.

1970년대 ‘율산 신화’로 유명한 신선호 전 센트럴시티 회장도 서울대 응용수학과 출신이다. 보험업계에서는 이정명 대한생명 사장(서울대 수학과)과 김영진 PCA생명 사장(부산대 수학과), 권처신 제일화재 사장(고려대 수학과), 김순환 동부화재 사장(고려대 수학과)이 수학을 전공했다. 제조업 중에서는 이헌식 삼성코닝정밀유리 사장(서울대 수학과)이 눈에 띈다. 백신 소프트웨어 알약으로 유명한 이스트소프트 김장중 사장(한양대 수학과)도 수학과를 나왔다.

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입력일시 : 2009년 12월 15일 10시 9분 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