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SA실패해본 사람만 채용

2009. 12. 26. 00:48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부도기업인 송년회…"꿈을 포기하지 않는한 희망은 있습니다"
[매일경제] 2009년 12월 25일(금) 오후 05:41   가| 이메일| 프린트

온라인 모임 전국재기기업인협회에서 '도망자'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부도 기업인 최오성 사장(가명)은 내년에 있을 큰딸 결혼식을 앞두고 용기를 냈다. '나 때문에 처가가 망했다'는 죄책감에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을 결심했던 그였다.

2001년 5월. 최 사장은 "아내와 자식은 굶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아파트를 아내 명의로 돌려놓고 합의 이혼을 했다. 7월 부도 당일 오전. 그는 미국 LA행 비행기에 홀로 몸을 실었다. 그 뒤에 단 한 번도 아내와 자식 얼굴을 보지 못했다.

부도 후 장인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연대보증을 섰던 동서는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다.

악에 바친 아내는 "당신 때문에 우리 집이 거덜났다"며 국제전화를 걸어 쏴붙이기 일쑤였다.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법적으로 잠시 이혼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아내는 그를 원수로 여긴다. 사실상 이혼이다. 오해를 풀기 위해 귀국을 고려했지만 협력업체들이 그를 사기 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인천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체포될지 모른다.

하지만 최 사장은 용기를 냈다. "'꼭 아빠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서고 싶다'는 큰딸의 소원을 반드시 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최 사장처럼 자신의 처지를 호소할 곳을 찾지 못하는 부도 기업인들이 "2010년에는 꼭 재기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뭉쳤다.


지난 24일 늦은 밤 경기도 일산시 주엽동에 있는 한 상가. 약 13㎡(4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기업 경영자(CEO) 20여 명이 빙 둘러앉아 있고, 벽면에는 'Comeback(되돌아오다)'이라는 큼직한 문구가 적혀 있다. 전국재기기업인 모임이라는 이색적인 송년회다.

김진일 전국재기기업인협회장은 "부도가 임박한 CEO들과 부도난 기업을 살려보려는 이들, 그리고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이들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멘토 기업인들이 참석했다"고 설명했다.

이날은 2009년 네 번째 오프라인 정기 모임이자 올해 마지막 만남이다. 현재 1500명 넘는 회원들이 홈페이지(comeback.or.kr)를 통해 부활을 꿈꾸고 있다. 정기모임 때는 열성적인 회원 20~30명이 참석해 재기에 성공한 선배 기업인에게 노하우를 전수받는다.

김 회장이 회원들에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선 반드시 실패를 해 본 사람만 채용한다고 합니다. 큰 위기에선 실패해본 사람만이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하지요. 실패는 오히려 큰 자산입니다."
참석자들은 그의 말 한마디에 귀를 쫑긋 세웠다. "부도가 나더라도 절대로 도망가선 안 됩니다. 1~2년 숨어 있다 나오면 다 잊힐 것이라고 착각들 하시는데, 사장이 도피하면 직원들이 3개월 밀린 임금을 1년치나 밀렸다고 허위 진술을 하는 등 채무만 부풀려집니다. 오히려 사장은 해명할 기회만 잃어버려요. 정면대응하세요."
협회장 말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서로 악수를 청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숨 돌렸습니다." 박성범 사장(가명)이 한 멘토 사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현재 경기도 반월공단에서 반도체 장비 업체를 운영하는 그는 올해 부도와 회생 사이에서 피 말리는 한 해를 보냈다.

위기는 2월 초에 찾아왔다. 어음 만기일이 3월 말 한꺼번에 몰리면서 막아야 할 어음만 10억원을 넘었다. 월평균 매출액은 지난해 10억원에서 절반 가까이 떨어진 상태. 부도가 불 보듯 뻔했다. 다급했다. 좀처럼 회사 얘기를 가족에게 꺼내지 않았던 박 사장이지만 만기 20일을 앞두고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담보로 잡은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갈 것 같아…."
장남이 소리쳤다. "아버지, 방법이 있어요." 큰아들은 부도 기업인 모임에 참석할 것을 권유했다. 협회를 통해 변호사를 소개받고 곧바로 기업회생 절차 개시를 신청했다. 채권자에게 넘어갈 자산을 일단 보전했다.

이제 법원에서 회생계획 인가를 받기 위한 채권자 과반수 동의가 필요했다. 12월 2일까지였다. 박 사장은 9개월 동안 설득에 매달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12월 2일 오전, 한 업체에서 위임장을 받아 결국 67%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법원은 그날 오후 회생 절차 개시 결정을 내렸다. 주변에선 기적이라고 말했다. 부채를 10년간 유예받은 덕분에 그는 다시 꿈을 키울 수 있게 됐다.

2004년 7월 어음 15억원을 막지 못해 부도를 경험했던 오봉일 가방클럽닷컴 사장은 모임에서 최단기간에 재기에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힌다. 학원과 기업을 상대로 가방 20여 종을 생산하고 있으며 올해만 가방 50만개를 제작해 판매했다.

오 사장은 5년 전 경기도 포천에 있는 1억5000만원짜리 아파트와 6억원 상당 공장을 경매로 넘긴 뼈아픈 경험을 기억했다.

하루는 검정 양복을 입은 장정들이 따라오라며 끌고 갔다. 도착한 곳은 5000만원을 대출했던 사채업자 사무실. 오기가 발동한 오 사장은 "내가 지금 망했으니 1000만원만 더 빌려주면 그 돈으로 사업을 해 갚겠다"고 대꾸했다. "그 사람도 어의가 없었는지 웃기만 했는데, 너무 자신 있게 말하니 돈까지 빌려줬습니다."
하지만 재기는 꿈이었다. 사업자등록이 불가능했기 때문. 그때 오 사장을 눈여겨보던 한 지인이 나섰다. 명의를 빌려 준 것이다.

2005년 1월. 70만원짜리 중고 재봉틀 2대를 구입하고 서울 중랑구 묵동에 있는 한 세탁소 지하실에 월세를 얻었다.

오 사장과 아내는 아침 7시부터 새벽 3시까지 가방을 만들었다. 다행히 운영하던 온라인 쇼핑몰은 살아 있었다. 주문을 받아 그날 그날 납품했다. 그의 솜씨를 기다리던 고객들이 몰려들었다. 6개월 만에 매출 1억원을 달성했다. 2006년 10억원, 2007년 20억원, 2008년 30억원…. 빚도 대부분 갚았다. 오 사장은 "한 번 망했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 노하우를 얻을 수 있었다"며 "회사를 꼭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전진하다 보면 나처럼 희망을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날 모임에 참석한 대다수 기업인이 박 사장과 오 사장처럼 재기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몇몇은 부도 위기에 몰려 기업 회생 신청을 준비 중이고 또 일부는 부도 뒤에 다시 창업할 길을 찾고 있다. 김진일 재기기업인협회장은 "부도 기업인에게는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겠느냐'는 긍정적인 생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스스로 밝은 마음을 가져야 가족도 돌볼 수 있고 회사도 되살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모임에서 회원들은 협회 이름을 부도기업인협회에서 재기기업인협회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내년에는 꼭 일어서겠다는 뜻이다.

[이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