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진,어소시에이트 아뜰리에

2010. 2. 6. 09:26건축 정보 자료실


건축가의 아틀리에는, 건축가의 건축 철학이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곳이다. 이우진어소시에이트의 아틀리에는, 생각이 천천히 걷는 공간이라는 뜻의 ‘소요 공간’을 표방한다. 이우진 대표가 직접 쓴 아틀리에 소개 글을 통해, 그의 건축 철학을 살짝 살펴본다.

에디터 | 이상현(shlee@jungle.co.kr), 자료제공 | 이우진어소시에이트



공간을 소요(逍遙)하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있습니다. 자신의 세계를 부려놓고 싶은 소우주 같은 공간이지요. 특히 하루의 절반 이상을 머무르게 될 제게 이 공간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나만의 아틀리에, 생각의 아틀리에…. 이 공간을 계획하면서 전체적인 테마로 잡았던 것은 장자의 ‘소요(逍遙)’라는 개념입니다. ‘자유롭게 거닌다’는 단어의 본뜻처럼 생각이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자연을 따라 사는 ‘무위, 도의 놀음’이라는 그 깊이 있는 의미처럼 ‘생각이 소요하는 공간’으로 디자인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 소박한 철학은 공간 곳곳에 묻어납니다. ‘철학을 공간 안에 재현하는 기술’이 곧 디자인이기 때문이겠지요.



취향은 철학을 반영한다
포장에 익숙한 인류는 그 알맹이가 무엇이든 ‘슬릭slick)하게’ 포장하고 싶어합니다. 원재료의 날 느낌은 최대한 숨겨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더 두껍게 화장을 합니다. 싸고 감추고 다듬는 것을 더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조금 갑갑해 보였습니다. 재료가 가진 자연스러운 본질과 물성을 살리고, 존재 그대로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싶었습니다. 얼굴에 주근깨가 있다면 그 주근깨를 가장 자연스럽게 내보이고 싶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형적인 예쁨보다는 규격화되지 않은 존재로서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긁힌 자국이 있는 부재의 생살 그대로가 아름답다는 생각입니다. 노출 콘크리트로 구조를 만들었고, 구로 철판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구로 철판 위의 곳곳에 철을 부은 얼룩이 그대로 남아있지만, 가장 ‘철판다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백이 말하게 하라
공간에서 느껴지는 고요함이 지루함이 되지 않도록, 재료들을 사선으로 배치해 공간에 역동성을 주었습니다. 건물의 매스는 직사각형이 아니라 상층부가 좁아지는 사다리꼴입니다. 사실 이 사선은 주변의 일조권 사선제한 및 도로 사선제한의 규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보통은 면적을 꼭 채워 쓰기 위해 두 면의 사선을 맞추지 않아서 미학적인 요소 없이 어색한 모습으로 공간이 설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한 면의 건축 면적을 버려두어 디자인 하였습니다. 과한 것은 언제나 부족한 것만 못하며, 그것은 제가 이 공간을 통해 구현하려 했던 소요(逍遙)의 뜻에도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심내지 않은 공간은 시선도 편안하게 합니다. 공간을 포기했지만, 너른 통 창으로 보이는 하늘을 얻었습니다. ‘디자인은 무엇을 더할 것인가 아니라 무엇을 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라는 격언처럼 여백은 침묵이 아니라 점과 선, 면, 컬러와 같은 중요한 디자인의 요소 중의 하나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결국, 일조권 사선제한이 오히려 공간을 활력 있게 하는 크리에이티브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이디어만 더해지면 규제가 언제나 숨막히는 답답함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선의 테마는 전체적인 매스 실루엣에서는 물론, 구체적인 디테일에서도 반복됩니다. 벽을 따라 채워진 책장의 기본 형태도 사선입니다. 건물 외장으로 쓰인 목재 또한 사선으로 배치했는데, 특히 네 면이 만나는 모서리에서의 사선은 이우진 어소시에이트의 상징이기도 한 매스(mass) 로고의 모습으로 구현됩니다. 배열된 패턴의 끝부분은 반듯하게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반듯하게 잘린 끝으로 보이는 하늘보다는 자연스러운 부재의 끝 선을 따라 흐르는 하늘이 더 하늘다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벽과 창이 겹쳐지는 곳에는 부재를 교대로 터서 햇빛이 숨을 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외부에서 보면 마치 건축물의 아가미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 공간은 조금 무뚝뚝해 보이기도 합니다. 숨막히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스타일리시한 공간은 아닙니다. 최소한의 것만 채우고, 남은 공간은 여백으로 채웠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채웠습니다. 사람이 가장 좋은 인테리어가 되도록, ‘객(客)’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디자인했습니다. 파이어 플레이스(fire place)를 중심으로 바닥보다 낮은 곳에 앉을 자리를 배치해 ‘객(客)’을 안으로 끌어들여 처음 찾은 공간이 낯설지 않고 아늑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제게 이런 공간에서는 일이 더 잘되지 않겠느냐고 묻지만, 사실 느는 것은 일보다는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결국 디자인이 단순한 데코레이션이 아니며 곧, 사유의 끝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사색은 오히려 제 디자인의 깊이를 깊게 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일이 잘 되는 것은 조금 다른 방식입니다. 전에는 화려한 수사와 꼼꼼한 PPT로 클라이언트를 설득해야 했다면, 지금은 공간 자체가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다. 이 공간에서 오가는 대화는 이미 딱딱한 비즈니스 대화 너머에 있곤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야말로 공간 디자인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유의 아뜰리에
제 외국인 친구는 이 공간을 보고 “natural oasis in the city”라는 표현을 하더군요. 도심에서 빗겨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공간이라면서요. 저도 이 곳을 디자인하면서 이 공간이 일에 치이는 딱딱한 사무실이 아니라 생각이 머무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작업실을 너머 사유의 아틀리에로서의 공간, 생각이 숨을 쉬고 소요하는 공간. 이것이 소박하지만,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제 아틀리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