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성보단 고수익 경쟁… 건전성 악영향 우려
#1. 지난달 몇몇 대기업 사업장에서 퇴직연금 설명회를 벌였던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해도 너무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일부 중소 증권사 영업사원들이 현장에서 해당기업 근로자 대표 등에게 은밀히 PMP, MP3 등 소형 전자제품을 경품으로 건네더라는 것. 그는 "극히 일부지만 현금이나 백화점 상품권까지 돌렸다는 말이 들릴 정도"라고 개탄했다.
#2. 인천 남동공단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김모(54) 사장은 최근 평소 거래가 없던 모 은행으로부터 깜짝 제안을 받았다. 다른 은행 절반 수준의 이자로 엔화 대출을 해 줄 테니 퇴직연금에 가입해 달라는 것. 김 사장은 "연리 8%가 넘는 엔화 대출금리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주거래은행 관계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며 "퇴직연금이 그렇게 대단한지 몰랐다"고 말했다.
국내 금융권의 '마지막 블루오션'으로 꼽히는 퇴직연금 시장이 과열 양상을 넘어 묻지마 유치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금융사들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수익률을 앞다퉈 제시하는 것은 기본. 일부는 불법 경품이나 저리대출 같은 '당근'을 제시하기도 하고, 또 어떤 곳은 대출을 미끼로 퇴직연금가입을 종용하는 '꺾기(채찍)'을 내놓기도 한다.
도 넘은 경쟁
지난해 말 10조원 남짓이던 국내 퇴직연금 가입규모는 올 들어 순식간에 15조원대를 돌파한 데 이어 올해 말 25조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내년부터 종래의 퇴직보험ㆍ신탁 등이 퇴직연금으로 전환되면서 대규모 사업장들이 속속 새 사업자를 고르고 금융사들은 앞다퉈 이를 선점하기에 나선 것이 최근 과열 양상의 배경이다.
은행ㆍ보험ㆍ증권사들이 기업들에게 내세우는 가장 큰 무기는 '고금리'다. 최근 퇴직금 중간정산을 한 KT와 강원랜드, 한국은행, 한국수력원자력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 대부분 금융사들은 연 7.0~7.5%에 이르는 확정 고금리를 근로자들에게 제시했다. 특히 일부 소형 증권사들은 주가연계증권(ELS) 발행을 통해 연 9.0% 가까이 약속하겠다며 금리 경쟁에 불을 붙였다.
갖가지 형태의 '당근'도 난무하고 있다. 퇴직연금 관련 설명회에는 자료 외 경품 제공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전자제품이나 백화점 상품권 등 은밀한 선물이 오가고 있다. 모 은행 지점장은 "은행권에서도 일부는 퇴직연금 가입시 대량의 콘도 이용권을 약속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이런 거래는 회사 대표가 아닌 퇴직연금 선택권을 쥔 근로자 대표들에게 은밀하게 전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단속의 손길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을 상대로는 은행이 대출 연장이나 한도 증액을 제시하며 퇴직연금 가입을 유도하는 '꺾기' 형태의 유치전이 한창이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인천 남동공단을 중심으로 6~7% 금리로 엔화대출을 받고 있는 우량 중소기업에게 은행들이 3% 이하의 저리 융자를 제시하며 퇴직연금 가입을 유도하자 경고 공문을 발송하기도 했다.
경쟁이 도를 넘으면서 일부 증권사와 은행은 경쟁에서 스스로 물러나기도 한다. 삼성증권은 앞으로 퇴직연금 중 금리 경쟁이 가장 치열한 개인퇴직계좌(IRAㆍ퇴직금을 근로자 명의의 계좌에 적립해 연금 등 노후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제도)에 대해 확정금리를 제시하지 않기로 했다. 기업은행도 윤용로 행장이 직접 나서 고금리 경쟁을 자제하라고 지시했을 정도다.
공멸 우려
은행ㆍ보험권의 전통 경쟁구도에 새로 증권사들이 뛰어들면서 시장 선점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문제는 장기 상품인 퇴직연금을 유치하면서, 대다수 금융사가 1년 약정 금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 형식상 매년 운용사와 계약을 갱신하는 구조여서 장기간 제시하는 금리가 성에 차지 않으면 언제든 운용사를 옮기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ELS 등 투자상품을 앞세워 증권사들이 고금리에 불을 당기자, 최근 예금금리 평균이 3.2%에 불과한 시중은행들은 두 배가 넘는 6%대 금리를 제시하고 있고, 대형 보험사들도 기존 6%전후이던 금리를 최근 7% 안팎까지 올렸다.
결국 금융사 입장에서는 이 같은 고금리를 보장하려면 위험투자상품으로 수익을 내 전체 수익률을 맞춰야 하는 셈인데, 그만큼 이익이 나면 문제가 없지만 손해가 날 경우 고스란히 자기 자금으로 나머지 수익률을 메워야 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퇴직연금은 최소 10년 이상 안정적인 수익률을 거둘 수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돼야 한다"며 "현재 퇴직연금 상품은 사실상 단기 고수익 특판 상품이나 다름없어 자칫 금융사들의 건전성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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