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콘크리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

2010. 6. 20. 10:17건축 정보 자료실

 

[Weekly BIZ] '빛과 콘크리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 반전 드라마

오사카=정철환 기자 plomat@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건축을 뒤집다, 인생을 뒤집다
예술혼으로 똘똘 뭉친 게릴라… "도전, 또 도전만이 창조를 낳는다"
'빛'이 된 삶…프로 복서의 고단한 생활에서 독학으로 건축공부, 틀을 깨다
'콘크리트' 같은 집념…공모전 연전연패에도 포기안해"실패가 나를 단련시켰다" 도전

그는 오사카(大阪) 변두리 출신의 권투선수였다. 열일곱 나이에 프로복싱에 뛰어들어, 대전료를 받아 생계에 보탰다. 함께 사는 가족이라고는 외할머니밖에 없는 결손 가정의 청년에게 권투는 희망이었다. 한 경기 3회전에서 4회전, 6회전까지 점점 실력이 늘어갔다. 언젠가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두르리라는 꿈도 커져갔다.

하지만 최고와의 수준 차이를 절감하는 순간, 모든 희망이 날아가 버렸다. 권투에 입문한 지 2년 만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당대 최고 복서의 스파링을 보고 기가 질려버렸다. 스피드, 파워, 회복력…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글러브를 벗고 취직을 했다. 공고를 졸업한 스무살 청년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별볼일이 없었다. 불 같은 성미에 답답한 회사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며칠 밤낮을 고민하다 집 짓는 일이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동네 목공소는 그의 놀이터였다. 문득 목수가 외할머니집 지붕에 만들어 준 창문을 통해 쏟아지던 새하얀 빛과 창문 너머로 펼쳐진 파란 하늘이 떠올랐다.

안도 다다오. /블룸버그

'빛과 콘크리트의 예술가'로 유명한 일본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의 인생 드라마는 이렇게 시작한다. 1960년대 초반 뒤늦게 건축업에 뛰어든 그는 건축에 대한 모든 것을 현장에서 독학으로 익혔다. 동네 가게의 인테리어나 가구를 만드는 일로 기초를 닦았고, 유명 건축가의 책을 닳도록 반복해 읽었다. 도면 하나하나를 베껴 그리기도 했다. 스물네살 되던 해에는 전 세계를 유랑하며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을 둘러봤다.

이렇게 성장한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노출 콘크리트 기법(외장재 없이 건물의 콘크리트벽을 그대로 드러냄)과, 실내에서 자연광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건물이 자연환경과 지역적 특색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하는 신선한 건축 양식을 내세워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만의 독특한 건축 설계에 반대하는 정부 규제 당국이나 건축주와 잦은 승강이를 벌이면서 '투쟁하는 건축가'라는 이름도 얻었다. 1969년부터 최근까지 그가 휩쓴 세계적 건축상은 150여개. 그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 중 한 사람이다.

Weekly BIZ는 지난 9일 그를 만나기 위해 오사카 시내 우메다(梅田) 인근의 '안도다다오건축연구소'를 찾았다. 낡은 서민형 주택들 사이에 자리 잡은, 콘크리트 원통을 세로로 잘라놓은 것 같은 건물. 불과 100㎡(30평) 남짓한 대지에 5층으로 쌓아올린 건물은 사방 벽면에 빽빽이 꽂혀 있는 책들이 점령했다.

이렇게 좁은데도 건물의 3분의 1쯤은 1층부터 5층까지 천장이 뻥 뚫려 쭉 이어져 있는 구조다. 그 밑바닥에 안도 다다오의 책상이 있다. 이 툭 터진 공간을 통해 건물 전체가 완전히 통해 있다. 목소리를 조금만 높이면 1층에 있는 사람이 4층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오사카 외곽 이바라키(茨木)에 위치한 빛의 교회. 안도 다다오의 1990년 작품이다. /안도다다오건축연구소 제공

뒤따라 올라온 안도 다다오는 인터뷰가 무척 익숙해 보였다. "어디서 왔느냐" "이번 인터뷰의 주제가 뭐냐"며 역(逆)질문공세를 펼쳤다. 유심히 보니 그의 모습은 귀와 이마를 완전히 덮는 덥수룩한 머리에, 셔츠 위에 헐렁한 재킷을 걸친 것까지 평소 사진에서 보던 것과 똑같았다. 외모에 신경 쓰는 시간이 아까워 똑같은 옷,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고집한다는 한 물리학자의 얘기가 생각났다.

안도 다다오의 사무실 구조는 자신의 일하는 철학과 조직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일례로 그의 책상은 건물 출입구 바로 앞에 있어서 직원 중 누가 외출을 하고, 어떤 손님이 찾아오는지를 모두 알 수 있다.

30여명의 스태프는 따로 업무용 전화가 없다. 5대의 공용 전화가 있는데, 모두 안도 다다오의 책상 위에 있다. 전화를 걸거나 받으려면 안도 다다오가 지켜보는 앞에서 해야 한다. 한 직원은 "가끔 전화 통화가 길어지면 안도씨가 전화기를 빼앗아 들고 직접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사무실 안에서는 개인적인 이메일이나 인터넷, 휴대폰 사용도 제한된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갤러리 레스토랑‘글라스 하우스’. 제주 서귀포시‘휘닉스 아일랜드’리조트 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해변 언덕에 있다. 인간과 자연, 공간의 조화점을 찾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휘닉스아일랜드 제공

■나는 게릴라다

―직원들 입장에서는 답답할 것 같은데, 왜 이런 식으로 사무실을 운영하시나요.

"저 역시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직원들에게 노출되어 있으니까 사무실이 팍팍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창조적 예술가 조직으로서 계속 기능하려면 이런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 나름의 생각은, 우리처럼 창조하는 조직은 '게릴라 집단'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휘관 한 사람과 그의 명령을 따르는 병사로 이뤄진 군대 같은 조직이 아니라, 공통된 이상을 내걸고, 신념과 책임감을 가진 개인 하나하나가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 게릴라 집단 말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저와 스태프들 사이에 인식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혼(魂)이 통해야 한달까요. 저는 우리 조직뿐만 아니라 구성원 개개인도 게릴라처럼 행동하기를 요구합니다. 자기 혼자 힘으로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신속하게 실행하며, 돌발사태에도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 같은 것 말이죠."

개인이 조직의 일부로 기능하는 것이 군대다. 일본과 한국의 회사 조직도 대부분 비슷하다. 그래서 회사가 크면 클수록 개인이 부품화되기 쉽다. 안도 다다오는 자신의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의식을 가진 게릴라처럼 움직이기를 바랐다.

―그래도 인터넷이나 이메일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요.

"해도 됩니다. 하지만 최대한 절제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나 이메일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자꾸 연락이 와 시간을 뺏기게 되죠. 제가 우리 스태프들에게 자주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자기 의견을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또 듣자는 것이죠. 그래서 서로의 의견을 확실하게 이해하자는 겁니다. 이 회사는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같이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인터넷과 컴퓨터 때문에 오히려 우리 사회가 소통의 부족을 겪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의 인터넷 사회에서는 다들 상대의 의견을 안 듣고, 자기의 의견만 이야기하려고 하니까요."

그는 많은 일본인이 그런 것처럼 요즘도 편지나 엽서를 주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의 책상 위엔 세계 곳곳에서 온 엽서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는 통역이 자신의 말을 통역해 주는 짧은 짬에도 엽서에 일일이 에펠탑 같은 그림을 그리면서 사인을 했다.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Fort Worth)의 포트워스 현대미술관. 콘크리트와 유리로 만든 5개의 직육면체 건물이 얕은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붕의 차양을 열면 빛이 쏟아진다. /포트워스 현대미술관 제공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패배가 창조력의 원천

―독학으로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셨는데, 비결이 있나요.

"각자가 자기 나름의 방법을 찾아가니까 '독학(獨學)'인 것입니다. 뭘 공부해야 할지,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죠. 뭔가 의문이 생겨도 이를 물어볼 선생님이나 의견을 나눌 동료가 없습니다. 비결이란 게 있을 수가 없죠. 저는 한때 건축학과 교과서를 잔뜩 사다가 밤에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책을 읽었고,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집은 달달 외울 정도로 열심히 보기도 했죠. 일본 일주에 나서 일본 근대 건축의 영웅인 단게 겐조(丹下健三)의 건축과 일본의 전통 건축물을 둘러봤고, 유럽 여행을 하면서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건축물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 다른 개성을 갖고 있습니다. 저를 따라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합니다."

―지금까지 150건이 넘는 수많은 건축 작품을 선보여 왔는데, 마르지 않는 창조력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계속 도전하는 정신! 지난 40여년을 되돌아 보면, 제 생각과 현실의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항상 괴로워했죠. 건축 공모전에서도 대개 낙선을 하고, 돌이켜 보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패배를 체험했습니다. 연전연패(連戰連敗)였죠.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거듭해왔습니다. '이제는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도전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축적되어 나가는 것이죠. 이런 사고의 축적이야말로 창조를 가능케 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창조는 역경을 이겨내기 위한 싸움, 즉 도전을 계속 하는 정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매번 '이 기회를 놓치면 끝장'이라는 심정으로 작업마다 안간힘을 다했다"면서 "그런 역경 속에서 지속되는 긴장감을 견뎌낼 수 있는 강인함도 길러졌다"고도 했다.

요즘 그의 새로운 도전 대상은 지구 환경 개선이다. 지난 2007년부터 일본 도쿄만의 쓰레기 매립지에 나무를 심어 푸른 숲으로 재생하자는 우미노모리(海の森·바다의 숲)라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는데, 1인당 1000엔씩, 총 50만명에게 기부를 받아 비용을 댈 계획이다. "왜 건축가가 나무를 심느냐"고 묻자 그는 "건물 짓기도, 숲 가꾸기도 다 환경에 개입하여 그 장소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제주 서귀포시 섭지코지에 자리한 명상 갤러리‘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 안도 다다오 특유의 노출 콘크리트 건물을 제주의 상징인 돌담이 둘러싸고 있다. /휘닉스아일랜드 제공

■자연과 역사를 포용하는 건축

치열했던 70년 인생만큼이나 그의 작품 세계도 고정관념에 끊임없이 도전해 왔다는 점에서 게릴라적이었다.

―선생님의 건축을 '도시에 도전하는 건축'이라고 표현합니다.

"도미시마 주택이나 스미요시 나가야(住吉の長屋·1976) 등 제 초기 작품은 출입구를 빼놓고는 사방을 콘크리트벽으로 에워싸 완전히 밀폐된 공간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폐쇄된 벽 사이에서 풍부한 삶의 공간을 만들어내려고 했습니다. 폭 3.6m, 길이 14.4m의 좁은 공간에 중정(中庭)을 만들어 햇빛과 바람, 빗물 같은 자연을 집안 깊숙이 끌어들였습니다. 저는 이 집을 과밀화에 허덕이는 각박한 도시 환경에서 자연과 하나 된 개개인이 강인하게 뿌리내리고 산다는 의미를 담아 '도시 게릴라의 주거'라고 이름 붙였죠.

도쿄(東京)의 오모테산도힐즈(表參道ヒルズ·2006)도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1927년 지어진 일본 최초의 아파트 단지 도준카이아오야마(同潤會靑山)를 재개발한 것인데, 이곳의 유서 깊은 풍경이 도쿄의 무자비한 재개발 붐에 맞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새로 짓는 건물의 높이를 이 거리의 상징인 느티나무 가로수보다 낮게 설계하고, 건물 남동쪽 끝에 있던 아파트 1개 동을 복원해 남겼죠. "

도쿄의 패션 거리인 오모테산도힐즈. 유서 깊은 아파트 단지를 허물고 재개발한 쇼핑센터로, 300m에 이르는 느티나무 가로수 등 예전 풍경을 보전하기 위해 낮고 길쭉하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외형을 택했다./ 안도다다오건축연구소 제공

―자연과 역사, 지역과의 조화를 유난히 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자연은 일체입니다. 이 세상엔 인간만이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 바람, 나무, 동물, 곤충…. 다양한 것들이 인간과 함께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죠. 서양의 문화는 그 모든 것 중에 인간만을 중시하는 문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만물이 함께 공생(共生)하는 공간이며, 인간이란 그중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현재와의 연속성도 마찬가지지요. 제 건축은, 그런 가치를 추구합니다."

이런 고집 때문에 상업적인 요구를 하는 건축주와도 자주 마찰을 빚었고, "건축주를 교육시켜야 한다"는 발언을 해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오모테산도힐즈 건축 당시 100여명의 아파트 소유주들과 충돌하고, 설득하느라 4년이 걸렸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건축주가 원하는 대로 그저 기능만을 충족하려고 하면 따분한 짓밖에 하지 못한다. 예산 제약은 어쩔 수 없어도, 그 밖의 사항은 안이하게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건축주와 다투더라도 상대가 진저리를 내며 체념할 때까지 내 고집을 밀고 나갔다. 현장 시공팀에 대해서도 시공 결과가 나쁘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재시공을 요구했다."

기자는 그의 주름진 얼굴 위에서 여전히 링 위에서 펀치를 내뻗는 권투 선수의 모습을 보았다. 공식적으로는 이미 40년 전에 끝난 경력이지만, 그는 여전히 매일 '건축'이라는 링에 올라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승부사의 삶을 살고 있었다.


■ 안도 다다오에게 한국은…
"내향적으로 침잠한 일본 도전적인 한국을 배워야"


도전적인 삶을 살아온 그에게 도전 의식이 없고 내향적인 일본 사회는 강한 불만의 대상이다. 그는 일본이 외향적이고 도전적인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요즘 한국의 분위기가 아주 좋은 것 같아요. 세계화에 아주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아주 힘이 있다는 느낌입니다. 반면 일본은 내향적으로 침잠하고 있죠. 일본은 2차 대전 후 경제적으로 풍요해지고 사회적으로 안정되면서 지나치게 내부 지향적으로 되어 버렸어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을 찾은 외국인들은 '일본은 자연이 수려하고, 사람들이 감성적이며, 가족 중심적이고 지역사회를 중시한다'면서 매우 높게 평가했는데, 요즘은 가족이, 지역사회가, 자연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점점 개인의 책임감과 자립하겠다는 의식, 도전하겠다는 의식이 약해지고 있어요. 반면 한국은 외향적이고 도전적입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국가에 대한 애정과 충성의 의식이 여전히 강해요.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는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저는 일본이 그동안 너무나 평화롭고 안정된 세월을 누려온 것이, 결국 국가와 사회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미술관 덕분에 세계적 명소가 된 나오시마(直島)섬에 일본에서 활동 중인 작가 이우환(74)씨의 미술관을 지었다며 무척 자랑스러워 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이우환씨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미국의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됩니다. 이를 보는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일본 땅 위에 한국 사람의 미술관이 있고, 여기에 또 프랑스 사람이 작품을 전시하는구나'라며 지구는 하나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