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류 수출로만 10억달러 돌파 눈앞에 둔 김웅기 세아상역 회장
2010. 11. 14. 08:37ㆍC.E.O 경영 자료
![](http://file.mk.co.kr/meet/neds/2010/11/image_readtop_2010_619025_1289619087336760.jpg)
세아상역은 여러모로 신기한 회사다. ‘세계 최대 니트의류 제조 및 수출기업’이라는데 회장도, 회사도 일반인들에게 생소하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이 회사 저력은 만만찮다. 올해 의류 수출로만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 돌파를 눈앞에 뒀다. 더불어 김웅기 세아상역 회장(59)은 지진으로 고통받는 아이티에 의류공장을 짓기로 했는데 이 프로젝트를 함께 협의한 사람들이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장 막스 벨레리브 아이티 수상, 라스 서넬 국제금융공사(IFC) 사장, 루이스 모레노 미주개발은행(IADB) 사장 등이라고 하니 재계의 숨은 ‘거물’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김웅기 회장이 36세 때 창업
세아상역은 김웅기 회장이 36세 때 만든 의류회사. 세아상역 관계자는 “테이트 등 자체 브랜드도 갖고 있지만 이건 비교적 최근 일이고 주력사업은 의류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수출이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게 사실이다. 김 회장 역시 국내보다는 국외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쏟다 보니 국내 인지도가 낮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계 최대’란 건 어떤 측면에서일까. 지난해 미국 전체 의류 수입액은 643억달러. 세아상역은 이 중 1.4%를 차지했고, 특히 세아상역의 주종 품목인 니트 부문에서는 2.5%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세아상역 관계자는 “미국 수입의류시장 점유율을 단일 아이템으로 2% 이상 차지하고 있는 기업은 세아 외에는 아직 없다”고 소개했다. 지난해 총매출 1조5000억원, 올해 현재 6개국 17개 법인 21개 공장을 보유한 세아상역은 설립 이후 지금까지 매년 평균 약 26%의 매출 신장률을 기록 중이다. 세아상역의 태동기는 어땠을까. 전남대 섬유공학과 출신인 김 회장은 학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어린 시절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다고 단순히 ‘옷’만 유심히 본 것은 아니다. 제품이 시장에서 팔리는 과정, 즉 ‘사업’에 더 관심이 많았다. 대학 졸업 후 그의 행보에서 이는 잘 나타난다.
“대학 졸업 직후 부모님을 설득해 은행 도움으로 대지 165㎡(50평)를 구입했어요. 집을 신축해 팔면 돈이 되겠다 싶어서요.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설계 의뢰부터 자재 구입까지 모든 것을 혼자서 직접 관리했습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산전수전 다 겪은 연세가 지긋하신 목수들을 일당제로 고용해 일을 시켰던 거죠. 당시에 저는 현장 관리 외에도 낮에는 잡일을 도맡아 하고 밤에는 자재를 지키기 위해 현장에서 잠을 잤습니다.”
참 겁도 없다 싶다. 더군다나 결과물도 있었다. 집 3채를 판 것이다. ‘청년’ 김웅기는 이로써 ‘사업’에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 행보는 또 다른 창업이 아니라 취직이었다. 20대 ‘청년사장’이라지만 집을 파는 과정에서 ‘대학 졸업하고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을 정도로 회의를 느꼈다는 것. 이후 그는 앨범 생산업체, 의류 수출업체 등에서 5년간 회사생활을 한다. 특히 두 번째 직장 충방에서는 생산 관리와 국외 영업을 맡으며 의류시장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입사 5년째가 되던 85년 연말 다시금 그는 마음을 다잡는다.
“80년대 초는 의류 수출환경의 유연성이 없었고 대부분 철저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소규모 생산시설을 이용해 영업과 생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눈에는 영업과 생산 활동이 폐쇄적으로 보였는데 이를 바꿔 창조적 사고와 시스템으로 영업을 하면서 대규모 생산 공장을 경쟁력 있는 국가들에 세워 의류 수출을 글로벌화하고 싶었어요. 또 연구개발(R&D)과 디자인 면에서 바이어들을 이끄는 회사를 경영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김 회장의 나이 36세. 집에는 아내와 두 살, 네 살인 딸 둘이 있었다. 서울 공덕동에 조그만 사무실을 내고 주식회사를 설립할 자본금이 없어 세아교역이라는 이름의 개인회사로 출발했던 것이 오늘날 세아상역의 시발점이었다.
물론 고생도 많이 했다. 김 회장은 창업 초기에 운영자금 부족과 원자재 파동, 수출쿼터(제한정책) 등 삼중고에 시달려야 했다고 전했다.
“돈도 없었지만 돈이 생겼다 해도 문제였어요. 당시 원사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는데 저희처럼 인지도가 없었던 회사는 담보와 자금이 있어도 원사를 매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2004년 말까지 지속됐던 섬유의 수출쿼터는 당시 저희와 같은 신생업체에게 할당될 만큼 넉넉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쿼터 권리를 사고팔거나 대행하는 게 당시에는 ‘사운’을 걸었다고 할 정도로 중요했지요.”
과테말라 법인장 납치사건 이후 방탄차 제공
김웅기 회장이 36세 때 창업
세아상역은 김웅기 회장이 36세 때 만든 의류회사. 세아상역 관계자는 “테이트 등 자체 브랜드도 갖고 있지만 이건 비교적 최근 일이고 주력사업은 의류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수출이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게 사실이다. 김 회장 역시 국내보다는 국외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쏟다 보니 국내 인지도가 낮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계 최대’란 건 어떤 측면에서일까. 지난해 미국 전체 의류 수입액은 643억달러. 세아상역은 이 중 1.4%를 차지했고, 특히 세아상역의 주종 품목인 니트 부문에서는 2.5%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세아상역 관계자는 “미국 수입의류시장 점유율을 단일 아이템으로 2% 이상 차지하고 있는 기업은 세아 외에는 아직 없다”고 소개했다. 지난해 총매출 1조5000억원, 올해 현재 6개국 17개 법인 21개 공장을 보유한 세아상역은 설립 이후 지금까지 매년 평균 약 26%의 매출 신장률을 기록 중이다. 세아상역의 태동기는 어땠을까. 전남대 섬유공학과 출신인 김 회장은 학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어린 시절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다고 단순히 ‘옷’만 유심히 본 것은 아니다. 제품이 시장에서 팔리는 과정, 즉 ‘사업’에 더 관심이 많았다. 대학 졸업 후 그의 행보에서 이는 잘 나타난다.
“대학 졸업 직후 부모님을 설득해 은행 도움으로 대지 165㎡(50평)를 구입했어요. 집을 신축해 팔면 돈이 되겠다 싶어서요.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설계 의뢰부터 자재 구입까지 모든 것을 혼자서 직접 관리했습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산전수전 다 겪은 연세가 지긋하신 목수들을 일당제로 고용해 일을 시켰던 거죠. 당시에 저는 현장 관리 외에도 낮에는 잡일을 도맡아 하고 밤에는 자재를 지키기 위해 현장에서 잠을 잤습니다.”
참 겁도 없다 싶다. 더군다나 결과물도 있었다. 집 3채를 판 것이다. ‘청년’ 김웅기는 이로써 ‘사업’에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 행보는 또 다른 창업이 아니라 취직이었다. 20대 ‘청년사장’이라지만 집을 파는 과정에서 ‘대학 졸업하고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을 정도로 회의를 느꼈다는 것. 이후 그는 앨범 생산업체, 의류 수출업체 등에서 5년간 회사생활을 한다. 특히 두 번째 직장 충방에서는 생산 관리와 국외 영업을 맡으며 의류시장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입사 5년째가 되던 85년 연말 다시금 그는 마음을 다잡는다.
“80년대 초는 의류 수출환경의 유연성이 없었고 대부분 철저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소규모 생산시설을 이용해 영업과 생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눈에는 영업과 생산 활동이 폐쇄적으로 보였는데 이를 바꿔 창조적 사고와 시스템으로 영업을 하면서 대규모 생산 공장을 경쟁력 있는 국가들에 세워 의류 수출을 글로벌화하고 싶었어요. 또 연구개발(R&D)과 디자인 면에서 바이어들을 이끄는 회사를 경영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김 회장의 나이 36세. 집에는 아내와 두 살, 네 살인 딸 둘이 있었다. 서울 공덕동에 조그만 사무실을 내고 주식회사를 설립할 자본금이 없어 세아교역이라는 이름의 개인회사로 출발했던 것이 오늘날 세아상역의 시발점이었다.
물론 고생도 많이 했다. 김 회장은 창업 초기에 운영자금 부족과 원자재 파동, 수출쿼터(제한정책) 등 삼중고에 시달려야 했다고 전했다.
“돈도 없었지만 돈이 생겼다 해도 문제였어요. 당시 원사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는데 저희처럼 인지도가 없었던 회사는 담보와 자금이 있어도 원사를 매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2004년 말까지 지속됐던 섬유의 수출쿼터는 당시 저희와 같은 신생업체에게 할당될 만큼 넉넉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쿼터 권리를 사고팔거나 대행하는 게 당시에는 ‘사운’을 걸었다고 할 정도로 중요했지요.”
과테말라 법인장 납치사건 이후 방탄차 제공
![](http://file.mk.co.kr/meet/neds/2010/11/image_readmed_2010_619025_1289619088336762.jpg)
악전고투 속에서도 사세를 차근차근 키워오던 세아상역이 본격적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사건이 있었다. 94년부터 국외 생산기지를 건설한 것이다. 지금은 철수했지만 김 회장이 첫 생산기지로 선택한 곳은 미국령 사이판.
김 회장은 “숙련된 외국인 근로자들이 있어 안정적인 품질과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는 데다 미국령에 부여된 면세(DUTY FREE)의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며 진출 배경을 소개했다. 이로써 우선 물량은 확보했다. 이는 바이어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는 배경이 됐다. 이와 더불어 ‘바이어나 제조회사나 공동 목적은 잘 팔리는 옷만을 제작하는 것이다. 단, 개별 바이어의 의존도는 30%를 넘기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했다. 유행에 민감한 패션시장에서 한 브랜드 때문에 매출이 휘둘릴 수는 없었기 때문. 대신 바이어와의 약속은 목숨을 걸고 지켜나가다시피 했다.
“2002년 10월에 과테말라 법인장이 납치됐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가슴에 총을 맞았어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분 가슴에는 지금도 총알이 박혀 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모든 임원들 차량은 방탄차로 변경했으며 항상 총기를 소지한 경호원을 대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 끝에 매출은 탄력을 받았다. 과테말라와 니카라과 등 추가로 국외 공장을 건설했지만 물량을 대기 어려웠을 정도. IMF 외환위기도 거뜬히 이겨냈다. 물론 원화가치가 2000원까지 떨어져 세아상역의 서울 본사는 담보가치 하락, 금융비용 증가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것이 사실. 하지만 국외 계약들은 모두 ‘달러’로 거래됐던 만큼 오히려 성장세에 불을 지핀 격이 됐다. 세아상역은 97년 매출액이 3700만달러 수준이었는데 98년에는 5800만달러, 2000년에는 1억2700만달러로 급성장했다. 2004년 사업은 또 한 번 탄력을 받았다. 미국의 의류 수출쿼터가 2005년 1월 1일부터 없어졌는데 세아는 선제적으로 인도네시아 공장을 매입, 2005년 1월 1일 이후 출하를 목표로 생산을 시작했던 것. 판단은 주효했다. 인도네시아 공장은 올해만 4억달러 이상의 수출실적을 예상할 만큼 효자로 자리 잡았다. 더불어 업계 최초로 디자인센터를 설립, 단순 제조를 넘어 바이어에게 새로운 디자인을 제시한 것이 성장의 또 다른 발판으로 작용했다. 이런 디자인 역량은 본격적인 브랜드사업으로 이어졌다. 단일 브랜드로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자체 개발 브랜드 ‘테이트’가 대표적. 간호섭 홍익대 패션디자인학부 교수는 “젊은이들의 트렌드를 잘 파악했다. 무채색 계열의 산뜻하면서도 감각적인 브랜드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지면서도 가격과 제품 제작 속도는 ‘동대문’식으로 합리적이라 경쟁력 있다”라고 평가했다. 더불어 꼼빠니아, 예츠, 트루젠 등을 보유한 인디에프(옛 나산)도 인수해 경쟁력을 더욱 키우고 있다.
“세아상역의 강점으로 인재경영도 빠트릴 수 없습니다. 제가 이전에 다니던 직장들의 급여 수준은 임직원들의 노력에 비해 매우 낮았습니다. 세아의 신입사원 급여는 연말 성과급까지 포함하면 5000만원에 육박합니다. 단순히 돈을 많이 주는 회사가 아닙니다. 저는 천성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실망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재들과 함께 세아상역을 지속가능한 기업으로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김웅기 회장은 아이티 공장 건설, 인도네시아 대규모 공장 증설 프로젝트 등을 수행하기 위해 한 달의 반 이상을 국외에서 보내고 있다.
[박수호 기자 suhoz@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581호(10.11.17일자) 기사입니다]
김 회장은 “숙련된 외국인 근로자들이 있어 안정적인 품질과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는 데다 미국령에 부여된 면세(DUTY FREE)의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며 진출 배경을 소개했다. 이로써 우선 물량은 확보했다. 이는 바이어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는 배경이 됐다. 이와 더불어 ‘바이어나 제조회사나 공동 목적은 잘 팔리는 옷만을 제작하는 것이다. 단, 개별 바이어의 의존도는 30%를 넘기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했다. 유행에 민감한 패션시장에서 한 브랜드 때문에 매출이 휘둘릴 수는 없었기 때문. 대신 바이어와의 약속은 목숨을 걸고 지켜나가다시피 했다.
“2002년 10월에 과테말라 법인장이 납치됐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가슴에 총을 맞았어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분 가슴에는 지금도 총알이 박혀 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모든 임원들 차량은 방탄차로 변경했으며 항상 총기를 소지한 경호원을 대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 끝에 매출은 탄력을 받았다. 과테말라와 니카라과 등 추가로 국외 공장을 건설했지만 물량을 대기 어려웠을 정도. IMF 외환위기도 거뜬히 이겨냈다. 물론 원화가치가 2000원까지 떨어져 세아상역의 서울 본사는 담보가치 하락, 금융비용 증가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것이 사실. 하지만 국외 계약들은 모두 ‘달러’로 거래됐던 만큼 오히려 성장세에 불을 지핀 격이 됐다. 세아상역은 97년 매출액이 3700만달러 수준이었는데 98년에는 5800만달러, 2000년에는 1억2700만달러로 급성장했다. 2004년 사업은 또 한 번 탄력을 받았다. 미국의 의류 수출쿼터가 2005년 1월 1일부터 없어졌는데 세아는 선제적으로 인도네시아 공장을 매입, 2005년 1월 1일 이후 출하를 목표로 생산을 시작했던 것. 판단은 주효했다. 인도네시아 공장은 올해만 4억달러 이상의 수출실적을 예상할 만큼 효자로 자리 잡았다. 더불어 업계 최초로 디자인센터를 설립, 단순 제조를 넘어 바이어에게 새로운 디자인을 제시한 것이 성장의 또 다른 발판으로 작용했다. 이런 디자인 역량은 본격적인 브랜드사업으로 이어졌다. 단일 브랜드로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자체 개발 브랜드 ‘테이트’가 대표적. 간호섭 홍익대 패션디자인학부 교수는 “젊은이들의 트렌드를 잘 파악했다. 무채색 계열의 산뜻하면서도 감각적인 브랜드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지면서도 가격과 제품 제작 속도는 ‘동대문’식으로 합리적이라 경쟁력 있다”라고 평가했다. 더불어 꼼빠니아, 예츠, 트루젠 등을 보유한 인디에프(옛 나산)도 인수해 경쟁력을 더욱 키우고 있다.
“세아상역의 강점으로 인재경영도 빠트릴 수 없습니다. 제가 이전에 다니던 직장들의 급여 수준은 임직원들의 노력에 비해 매우 낮았습니다. 세아의 신입사원 급여는 연말 성과급까지 포함하면 5000만원에 육박합니다. 단순히 돈을 많이 주는 회사가 아닙니다. 저는 천성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실망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재들과 함께 세아상역을 지속가능한 기업으로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김웅기 회장은 아이티 공장 건설, 인도네시아 대규모 공장 증설 프로젝트 등을 수행하기 위해 한 달의 반 이상을 국외에서 보내고 있다.
[박수호 기자 suhoz@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581호(10.11.1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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