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
박 대변인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중·고등학교 당시 월세방에 생활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어머니는 발레와 피아노를 가르칠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다. 어머니께 ‘책 그만 봐라, 공부 그만 해라’는 잔소리를 들을 정도였던 박 대변인은 이화여대 법학과에 진학했고, MBC 보도국 기자가 됐다.
박 대변인은 “어릴 때부터 꿈이 기자 아니면 교수였는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더 공부할 수가 없었다”면서 “현재 이름인 ‘박선영’은 ‘박운희’에서 개명한 것인데, 시청자들이 ‘MBC에는 박운희 기자밖에 없느냐’는 말을 할 정도로 온몸을 던져 일했다”고 말했다.
남편인 민일영 대법관과는 1983년에 결혼했다. 민 대법관은 1974년부터 9년 동안 박 대변인에게 구애했다. 가난한 고시생이었던 민 대법관은 산골의 어느 절에서 시험을 준비할 때도 한 달에 두세 통씩은 꼭 편지를 보내왔다. 시험에 합격한 이후에도 박 대변인 집 앞 잔디밭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렸다.
가난한 시댁 때문에 평생 고생만 했던 박 대변인 어머니는 결혼을 반대했다. 고시에 합격했지만, 남편은 마포 도화동 판잣집에서 살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박 대변인은 “당시 저는 정의감에 불타고, 피가 끓는 청춘이어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면서 “‘가난한 사람은 결혼도 못 하느냐’라고 말하고 남편에게 뛰쳐나갔다”고 회상했다.
청첩장도 돌리지 못하고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던 결혼이었다.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집을 샀고, 그나마도 시댁 생활비에 보태야 했다. 결혼 후 이사를 열세 번이나 다녔다. 박 대변인은 “당시 MBC 기자였고 남편은 판사였는데도, 방송국 구내식당 밥값 2500원이 없어서 굶는 날이 많았다”면서 “내가 만약 부잣집에 시집을 갔더라면 가난에서 헤어 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변인은 “정말 고마운 건 남편이 (결혼을 반대했던) 어머니께 꼬박꼬박 안부 전화를 한다는 것”이라면서 “그렇게 구박했으면 마음의 응어리가 남아 있었을 텐데, 그런 점에서 남편은 꽤 괜찮은 남자인 것 같다”고 말했다.
※기사 전문은 여성조선 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