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27. 09:44ㆍC.E.O 경영 자료
"대기업이 중소 영역 침범하면 모두가 피해"
조선비즈 이종현 기자 입력 2012.05.27 06:01
23일 오후 대전 유성구 대전컨벤션센터의 그랜드볼룸. 애플 공동창업주인 스티브 워즈니악과 황창규 지경부 R&D전략기획단장, 인마쿨라나 페리아네즈 포르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업과학기술연구 최고고문 등 국내외의 유명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중소기업기술혁신협회(이노비즈협회) 주최로 열린 이노비즈 글로벌포럼에서 중소기업인들에게 저마다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워즈니악의 기조강연과 황 단장의 강연이 끝나고 청중들의 시선은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에게 쏠렸다. 황 단장은 그를 "교토식 경영의 대가로 존경하던 분을 옆 자리에 모시게 돼서 영광"이라고 소개했다. 황 단장에 이어 강연대에 오른 이는 세계 1위의 분석-계측 장비 업체인 호리바제작소의 창업자 호리바 마사오(堀場雅夫·87)였다. 나무로 깎은 지팡이 하나만 손에 쥔 호리바 마사오는 다른 사람의 도움도 없이 직접 강연대에 올라 50여분간 쉬지 않고 서구자본주의의 병폐와 중소기업이 성공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얀 머리를 뒤로 묶어 꽁지머리를 한 이 노 기업인의 이야기를 수백명의 청중이 숨을 죽이고 경청했다.
◆ 대기업이 중소기업 영역 침범하면 모두가 피해
호리바 마사오는 1945년 교토대 재학 중에 호리바제작소를 창업했다. 일본 최초의 벤처기업 중 하나로 유리전극식 pH(산성도) 측정기를 개발하면서 계측장비업체로 성장하게 된다. 특히 자동차 배기가스 측정장치 분야에서는 세계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호리바 마사오는 현재는 사장에서 물러나 최고고문을 맡고 있다.
이런 배경 덕분에 호리바 최고고문은 중소기업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특히 대기업의 중소기업 영역 침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대기업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이 있다. 조선, 철강, 자동차 등은 대기업이 할 일이고 중소기업들은 이런 큰 산업의 틈새에 있는 일들을 맡아야 한다"며 "대기업이 이 틈새까지 장악하려고 하면 중소기업은 도산하게 되고, 대기업은 수익성이 적다면 결국 사업을 철수하게 되고, 소비자는 좋은 제품을 만들던 중소기업을 잃게 되기 때문에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호리바 최고고문은 적대적 인수합병(M&A) 같은 극단적인 경쟁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전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 극단적인 승자와 극단적인 패자의 구분이라는 것이다. 스포츠에서의 경쟁은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이런 경쟁이 경제·사회분야에서 일어나면 비극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비극들이 서구식 자본주의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극단적으로 말해 근대 서구문명이 붕괴하고 있다. 근대자본주의와 과학기술지상주의로 구성된 서구문명은 산업을 발전시키고 인류에게 편리함을 줬지만 언젠가부터 돈을 위한 게임에 이용되고 있다. 사람들에게 부가가치를 주기는커녕 경제불안을 초래하고 윤리와 도덕을 모두 상실한 채 본래의 기능을 잃었다."
그는 서구문명의 대안이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인 문화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과 종업원, 지역이 모두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관계를 쌓아야 한다. 유교의 기본 사상은 경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노력해서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것이다. 유교 사상을 경제에 접목해야 우리 사회와 우리 인류가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호리바 "'세븐일레븐' 기업 나라면 안 다녀"
호리바제작소는 특이한 사훈을 갖고 있다. 바로 '재미있고 즐겁게(Joy and Fun)'다. 교토의 호리바제작소 본사에는 이 사훈이 곳곳에 걸려 있다. 호리바 최고고문의 인생관이기도 한 이 사훈은 호리바 최고고문이 사장직에서 물러난 1978년 사훈으로 정해졌다.
이런 기업 분위기는 호리바 최고고문이 직접 쓴 책 '일 잘하는 사람 일 못하는 사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일 잘하는 사람과 일 못하는 사람을 독특한 기준으로 구분한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포기가 빠른 사람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판단이 빠르다는 뜻이다. 적이 많은 사람이나 이성에게 인기있는 사람도 일 잘하는 사람이다. 적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실질적인 능력이 있다는 뜻이고, 이성에게 인기 많다는 것은 자기관리에 능하고 유능하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호리바 최고고문의 즐겁게 일하자는 가치관은 지금의 호리바제작소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호리바 최고고문은 '재미있고 즐겁게'라는 사훈이 회사에 어떤 이익을 줬는지를 묻자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호리바제작소는 1950년대만 해도 인체에서 나오는 각종 가스를 측정하는 제품을 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 정부에서 자동차 배기가스 측정기를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들어왔다. 처음에 호리바 최고고문은 이를 거절했다. 인체를 측정하는 장비로 자동차를 측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자동차 배기가스 측정에 관심을 가진 한 연구원이 호리바 최고고문 모르게 제품을 만들었다. 이후 호리바 최고고문이 이 사실을 알고는 그 연구원에게 지시를 어겼다고 크게 화를 냈다. 그러자 그 연구원은 "재미있어 보이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결국 한 연구원이 재미로 시작한 자동차 배기가스 측정기는 호리바제작소의 주력 제품으로 성장했고, 지금은 전 세계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즐겁게 일하고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중시하는 호리바 최고고문에게 한국 대기업의 근무 환경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특히 '세븐일레븐(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11시에 퇴근한다는 말로 대기업 근무시간이 지나치게 길다는 뜻의 속어)'이라는 말이 한국 대기업 직원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처럼 나온다는 말을 해주자 한참을 웃으며 "나라면 그런 회사에서 일 안 한다"고 잘라 말했다.
호리바 최고고문은 "일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성과가 쌓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며 "사람을 머리를 활용해서 다양한 아이디어와 발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슬럼프가 오면 아무것도 못하기도 하지만, 아이디어가 한번 나올 때는 한꺼번에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컴퓨터 앞에 하루종일 앉아 있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 중소기업이 요코즈나(천하장사·대기업)와 경쟁하면 안돼
일본을 대표하는 중소기업인답게 호리바 최고고문은 중소기업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특히 틈새시장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요코즈나(일본 스모에서 가장 높은 등급으로 우리나라 씨름의 천하장사)와 겨뤄봤자 중소기업은 게임이 안 된다"며 "대기업과 겨루지 않고 틈새시장을 찾아야 한다. 틈새시장에는 항상 큰 수요가 있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호리바제작소는 아직 사람들이 오존층 파괴에 관심도 없을 때부터 오존 측정기 개발을 시작했고 이 덕분에 오존 측정기에서도 큰 수익을 냈다.
또 호리바 최고고문은 항상 자신의 회사보다 수준이 높은 기업과 협력해야 한다는 점과 회계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중소기업 경영자가 회계 문제를 대충 생각하고 막연히 잘 되겠지라고 믿는 순간 회사가 망한다"며 "성공한 중소 벤처기업인들은 금융기관과의 관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종업원의 월급 등 모든 회계 문제를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일본은 넌센스(nonsense)의 길을 가고 있다
호리바 최고고문에게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경제·사회의 변화상을 묻자 얼굴부터 찌푸렸다. 그전까지 웃음을 섞어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즐겁게 하던 것과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만큼 대지진 이후 일본의 상황은 심각했다.
그는 가장 큰 문제로 일본 사회 전체가 겁에 질려 제대로 된 길을 가지 못하는 점을 꼽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원자력발전소를 대하는 일본 사회의 태도다. 호리바 최고고문은 "일본 정부는 동일본 대지진으로 관동지방의 원전들이 피해를 입자 아무런 문제 없이 가동하고 있던 관서지방의 원전들까지 모두 가동을 중지시키고 있다"며 "대신 기업들에는 자가발전과 절전을 강요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자가발전 시설을 갖출 수 있겠지만 우리 같은 중소기업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우리는 전기가 싼 해외로 떠나게 되고 일본은 일자리 부족으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 정부와 언론, 여론이 원전 문제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지금 현재 일본은 넌센스의 길을 걷고 있다"며 "하지만 일본인들이 이번 아픈 경험을 계기로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면 일본은 다시 눈 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연 직후 한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가 끝나자 호리바 최고고문은 자신의 책 '일 잘하는 사람 일 못하는 사람'을 꺼내서 직접 기자에게 사인을 해줬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며 그에게 적지 않은 나이에도 계속해서 활발하게 활동을 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호리바 최고고문은 "뭔가 문제에 부딪히면 피하지 않고 그 문제를 파보기 시작한다. 이렇게 늘 새로운 분야에 흥미를 갖고 고민한다. 그러다 보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고 답했다. 구순(九旬)을 코앞에 둔 노 기업인의 에너지가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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