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20년과 조선족>① 빛과 그림자

2012. 8. 23. 09:24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한중수교 20년과 조선족>① 빛과 그림자

연합뉴스 | 홍덕화 | 입력 2012.08.23 07:02

 

<※편집자 주 = 한국과 중국이 24일로 국교 정상화 20주년을 맞는다.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중국동포) 사회는 변화의 물결에 휩싸였고 모국을 찾는 이들의 발길도 늘어났다. 중국의 조선족 밀집지역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반면 공동체가 해체되는 등 진통을 겪고 있다. 50만명에 달하는 국내 거주 조선족은 단순 노무직에 그치지 않고 각 분야에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연변 자치주'로 상징되는 조선족 사회의 변화상과 한국 내 조선족의 현주소를 살펴봤다.>

(서울=연합뉴스) 홍덕화·왕길환 기자 = 1992년 8월 역사적인 한·중 국교 정상화는 동북 3성의 조선족 동포들에게 '반세기 가뭄'의 끝을 알리는 '단비'였다.

오랜 역사적 유대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 정부 수립(1949.10)에 이어 6·25 전쟁까지 치르면서 양국 간 적대관계가 지속되자 한국과 조선족 사회의 거리는 서방의 어떤 나라보다도 멀어졌다.

그러나 수교 이후 조선족 사회는 모국과의 인적·물적 교류가 급진전되면서 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같은 언어를 쓰고 한민족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조선족은 모국과의 활발한 교류와 왕래 등에 힘입어 중국 내 50여개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성장을 이뤘다.

한국도 재중동포들과의 지속적인 협력에 힘입어 투자·교역 및 정치관계 등에서 급속도로 성장하는 등 호혜적인 결실을 봤다.

그러나 이러한 동반 성장의 이면에는 동북 3성의 조선족 인구 감소, 가정 해체, 불평등, 불법체류와 범죄 등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경제·문화적 신장 vs. 공동체 해체

수교 후 한국 기업들의 '차이나 러시' 가속화는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한국과 연고가 있는 지린(吉林)·랴오닝(遼寧)·헤이룽장(黑龍江)성 등 동포 집단거주 지역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이어졌다. 한국 언어와 문화에 익숙한 동포들이 한국계 기업에 노무직뿐 아니라 통역 등으로 일했고 한국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식당과 유흥업소도 번성했다.

7월 14일자 흑룡강신문에 따르면 올해로 설립 60주년(9.3)을 맞는 옌볜자치주의 지난해 지역내총생산(GRDP)이 652억위안, 1인당 생산총액은 2만9천782위안으로 1952년에 비해 각각 61배, 21.5배 늘었다.

수출입통계 작성을 시작한 1954년 38만달러이던 무역 규모도 2007년 10억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지난해 18억5천만달러로 늘어나 무려 5천배 증가했다.

옌볜주의 대학생 수는 2만2천명으로 1952년의 19.6배에 달했다. 공공도서관과 박물관은 각각 9개, 10개로 느는 등 교육과 문화 수준도 크게 높아졌다.

동포들이 '코리안 드림'을 좇아 본격적으로 한국을 찾게 된 것도 수교가 가져온 현상이다.

동포들은 국내 3D 산업의 인력난 해소를 위해 1993년 도입된 산업연수생 제도(2001년부터 '1년 연수, 2년 취업')와 방문 취업제(2007년) 등에 힘입어 단순 노무직을 중심으로 일자리를 찾아 대거 한국행 비자를 신청했다.

이들은 힘들게 번 돈을 고향으로 송금해 중국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조선족인터넷매체인 `조글로미디어'에 따르면 최근 해외 노무자들이 옌볜조선족자치주로 보내는 돈은 10억달러로 자치주 재정 총수입의 2.5배에 달한다.

그려나 조선족이 줄지어 한국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입국자가 브로커 등에 속아 귀국을 포기, 불법 체류자로 전락했다. 수교 후 주로 청년층이 구직이나 결혼을 목적으로 서울이나 상하이 등 대도시로 떠나면서 조선족 사회는 가족해체, 농촌 공동화 현상, 조선족 학교 급감, 청소년층의 정체성 상실 등을 겪어야 했다.

◇ 갈수록 줄어드는 동북 3성 조선족 인구

한때 200만명으로 알려진 동북 3성의 조선족 인구는 현지의 가임 연령층 감소에 따라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중국국가통계국이 지난 7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제6차 전국인구조사 민족별 인구통계자료에 따르면 1990년 제4차 인구조사(192만597명) 때보다 8만9천668명(4.6%) 감소했다.

2010년 말부터 지난해 초까지 진행된 이 조사 결과 중국 내 조선족은 여성(92만394명)이 남성(91만535명)보다 약간 많았다.

지역별로는 옌볜자치주가 있는 지린성의 조선족 인구가 104만167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헤이룽장성(32만7천806명), 랴오닝성(23만9천537명) 순이었다. 이들 동북 3성의 조선족 인구는 전체 조선족의 87.8%를 차지했다.

이밖에 산둥성(6만1천556명), 상하이시(2만2천257명), 네이멍구자치구(1만8천464명), 톈진시(1만8천247명), 광둥성(1만7천615명), 허베이성(1만1천296명) 등 그동안 한국 기업·기관의 진출이 활발했거나 산업이 발달한 도시에 집중적으로 분포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치주 지위 잃을 수도…동포사회 지원 시급

법무부 통계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은 29만7천명이고 조선족 결혼 이민자는 2만9천명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불법체류자 등을 합치면 37만명에서 최대 50만명으로 추산한다. 미국, 일본 등 해외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약 1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북 3성 지역의 조선족 인구가 감소하면서 옌볜자치주의 경우 1995년 조사 당시 86만명을 헤아렸으나 2009년 80만명으로 7% 가량 줄었다. 조선족 비율은 자치주 건립 초기인 1953년 조사 당시 70.5%에서 절반 수준인 36.7%로 크게 떨어졌다.

이 같은 조선족 감소세가 지속되면 옌볜이 조선족자치주 지위를 잃게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조선족 마을의 생활 터전도 크게 잠식된 상황이다. 농지와 주택 등을 처분한 뒤 고향을 떠난 조선족들은 귀국해도 이미 자리를 차지한 한족(漢族)에 밀려 소작농으로 전락하기 일쑤다. 경제적으로 성공해 귀국하더라도 이미 터줏대감이 된 한족과 충돌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한국내 조선족 위상 `3세대' 등장으로 높아져

중국 경제 발전의 디딤돌이 됐다는 평가로 조선족의 위상이 높아진 것과는 달리 한국 내 조선족의 위치는 여전히 바닥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한 부모 세대들의 노력으로 좋은 교육환경 속에서 한국이나 일본에서 유학했거나 중국의 명문대를 나온 `3세대'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이들의 평판도 서서히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실제 2008년부터 조선족에 대해서도 허용된 재외동포(F-4) 비자 가운데 우수한 인재(F-4-2)로 분류돼 비자를 발급받은 사람이 지난해 말 현재 2만9천617명에 달한다.

이들은 국내 대학과 대학원에 유학해 석·박사가 된 다음 취업을 하거나 중국 또는 다른 나라에서 전문가로 특별 채용돼 자리를 잡고 있다.

30~40대의 3세대들은 주로 대학교수를 비롯해 증권사 애널리스트, 정책연구원·기업의 연구원, 변호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 부모세대처럼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떳떳이 명함에 한글 이름과 중국 이름을 병기한다. 한국 국적 회복을 위해 노력한 부모와는 달리 국적에 집착하지 않는 특징도 있다.

하나대투증권에서 중국 증시 담당 애널리스트로 일하는 이기용(32) 씨는 "주위의 전문직 친구들은 회사에서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거나 무시를 받는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경쟁력을 갖춘다면 조선족의 위상도 자연스럽게 향상된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조선족들이 스스로 발전을 위해 좀더 노력한다면 장기적으로 조선족에 대한 인식도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씨와 같은 3세대들이 나오긴 하지만 아직은 조선족 하면 건설현장의 노무자, 식당 아줌마, 가사 도우미로 대변되는 3D 업종의 저임금 노동자를 떠올리는 `인식의 차'가 존재하는 것이 국내의 현실이다.

◇청소년 정체성 회복 지원 시급

김봉섭 재외동포재단 조사연구팀장은 조선족 사회의 최대 당면 과제인 인구 감소와 청소년들의 정체성 상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조선족들이 생활 터전에서도 돈벌이할 수 있도록 산업 인프라를 확충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3D 업종에 종사하는 조선족 동포들이 10년쯤 후에는 많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우리 기업들이 생산성 저하나 법률적 문제점 등에도 불구하고 동북 3성으로 거점을 옮기는 것을 적극 검토할 만하다고 권유했다. 고용을 창출하면서 현지의 농·공업 활성화를 지원하는 것에 관심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김 팀장은 특히 청소년들을 위해 언어 교육과 학교 교육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해외 체류 중인 조선족들이 화교사회에 편입되지 않고 한인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서경석 조선족교회 담임목사는 교회 신도들의 손주 중 절반 가량이 한족과 결혼하고 있다며 한족화 추세를 우려했다.

서 목사는 "이스라엘에서는 피가 4분의 1만 섞여도 자국인으로 간주하는 데 비해 우리는 부모 중 한 명이라도 국적자가 아니면 법적으로 이방인이다"라며 국적법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조선족 인구를 어떻게 200만명 선에서 유지하느냐를 중요한 과제로 삼아야 한다"면서 "한족 며느리나 사위에게도 법적·제도적 혜택을 줘 이들을 우리 사람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조선족 문제를 둘러싼 한중 간 갈등과 관련해 정치적 차원이 아니라 경제·실무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인하대 이진영 교수(정치외교학과)는 조선족 대다수가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기며 경제적 동기 때문에 한국 이주를 결정했다고 밝히는 점에 주목했다. 또 한족들의 한국 이주도 늘어나면서 조선족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시도도 잘 먹히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한·중 간 대화를 통해 국내 체류 중인 조선족들이 중국의 실업문제를 해소함으로써 동북 3성 지역의 사회적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 등을 강조하는 등 조선족 문제의 탈정치화를 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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