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비하인드 스토리

2012. 8. 21. 15:28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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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e decided to give up all my dreams of a free and easy life as an individual.’ - Park Geun-hye
박근혜, 父 사망 듣자마자 한 질문이…놀라워

 

박근혜, 父 사망 듣자마자 한 질문이…놀라워

'18년 은둔' 박근혜 "돌이켜보면 내첫사랑은…"

박근혜 60년 라이프 스토리
교수 꿈꾸다 22세에 퍼스트레이디 … 천막당사 리더십으로 대선주자 대열에


대통령의 큰딸에서 20대 퍼스트레이디. 이어진 18년간의 은둔과 정계 입문. 그의 개인사는 대한민국 정치사와 얽혀 흘러왔다. 1961년 5·16과 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 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살,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그리고 오랜 공백 뒤 그는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치의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그로부터 15년 뒤 여당의 첫 여성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삶은 파란만장한 굴곡을 담고 있다.

◆큰 영애(令愛) 박근혜=박근혜는 6·25전쟁 중인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희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제1정보과장(소령)이었고 어머니 육영수는 ‘옥천 갑부’로 소문난 육종관의 둘째 딸이었다. 대구에서 태어났으나 두 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란 박근혜는 서울 장충초등학교를 다녔다.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도 당시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삼국지를 탐독했고, 조자룡을 좋아했다. “돌이켜 보건대 나의 첫사랑은 조자룡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그가 등장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5·16을 일으킨 박정희가 2년 뒤 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박근혜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큰 영애’로 불리게 됐다. 영애 시절 박근혜의 퍼스낼리티는 검소한 육영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박근혜와 중·고 6년을 함께 다녔던 친구 서임정은 “근혜는 보리밥에 감자조림 반찬을 자주 싸왔고 외제 학용품이 없었다. 친구들이 일제 학용품을 갖고 오면 ‘예쁘다’며 부러워했다”고 기억했다.

 성심여중·고 시절 박근혜는 줄곧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중2 때 실시한 IQ 검사 결과는 127이었다. 고교 생활기록부엔 호평이 많지만 “지나치게 어른스러움이 흠” “지나친 신중성 때문에 과묵한 편”이란 평가도 있다.

 그는 “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며 71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청와대 2부속실 비서관을 지낸 정재훈(전 개포중 교장)은 “육 여사는 큰 영애가 사학과에 가길 바랐지만 전자공학을 하겠다는 신념이 워낙 확고했다”며 “육 여사가 ‘근혜가 보통 여인들이 가는 평범한 길을 가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회상했다. 박근혜는 서강대 이공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4년 평균 학점이 4점 만점에 3.82였다.

◆비운의 퍼스트레이디=74년 대학 졸업 후엔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교수가 되려는 꿈이었다. 그해 8월 박근혜는 친구들과 여행 도중 대사관 측으로부터 급히 귀국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영문도 모른 채 짐을 챙겨 공항에 갔다가 가판대에 꽂힌 신문 제목을 봤다. ‘Madam Park, Assassinated’(육 여사 암살되다). 어머니의 죽음을 그렇게 알게 됐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박근혜는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고 했다. 22살의 박근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엿새 뒤부터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그 무렵 그의 일기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지금 나의 가장 큰 의무, 그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가 외롭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다.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1974년 11월 10일)

그는 유신 정권에서 5년간 퍼스트레이디로서 각종 행사에 참석했고 외국사절을 맞이했다. 이 무렵 그의 어두운 그림자가 최태민(1912~94) 목사다. 최태민은 74년 육영수 여사 사망 직후 박근혜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75년 청와대에서 박근혜를 만나 여러 조언을 한 뒤 측근이 됐다. 최태민은 그해 ‘대한구국선교단’(76년 구국봉사단, 78년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을 발족했는데, 이게 박근혜 대외 활동의 본산이 됐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공개된 중앙정보부의 ‘최태민 수사자료’에 따르면 최태민은 박근혜를 등에 업고 여러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했고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돼 있다. 김재규는 10·26 항소이유서에서 자신이 최태민 문제를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게 10·26을 일으킨 한 요인이 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은둔의 대통령 딸=79년 10월 27일 새벽 1시30분쯤 박근혜는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때 박근혜가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는 건 잘 알려진 얘기다. 박근혜는 동생들을 데리고 79년 11월 청와대를 나와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박근혜에게 대통령 유자녀 생계비 명목으로 6억원을 전달했다. 박정희가 쓰다 남은 통치자금이었다.

 여동생 박근령은 “언니는 신당동 거실 한쪽의 아버지가 쓰던 낡은 책상에 앉아 추모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는 일로 소일했다. 외출에서 돌아와보면 언니 혼자 ‘TV문학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박근혜는 야인 시절 서울시내 한 호텔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장관을 지낸 A씨와 마주친 적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안녕하셨어요?”라고 인사를 건넸지만 A씨는 대꾸는커녕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 눈길 한 번 안 주고 있다가 가버렸다. 당시 일기의 한 토막이다.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사이다.”(1981년 3월 2일)

80년대 박근혜의 대외 행적은 드러난 게 많지 않다. 주로 육영재단·영남재단·정수장학회 일을 맡았다 놓았다 했다. 80년 4월 박근혜는 박정희가 설립한 영남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지만 학생들이 반발하자 물러났다. 81년엔 장신대 기독교교육학 대학원을 한 학기 다녔다. 82년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의 도움으로 성북동에 집을 얻어 이사했고 그해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최태민도 이때 육영재단에 다시 합류했다. 그 무렵 사촌오빠 박재홍(11~14대 의원)은 박근혜에게 결혼을 권했으나 박근혜는 “오빠. 이제 그 소린 하지도 마세요”라고 펄쩍 뛰었다.

90년엔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동생인 근령에게 넘겼다. 근령을 지지하는 ‘숭모회’가 “최태민 목사가 박근혜 이사장을 배후에서 조종한다”며 분규를 일으키면서다. 박근혜는 “육영재단 운영을 그만둔 뒤부터 비로소 나는 나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94년엔 정수장학회를 물려받아 운영했다가 2005년 물러났다.

◆정치인 박근혜=박근혜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97년 외환위기였다. 그는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나 혼자만 편하게 산다면 죽어서 부모님을 떳떳하게 뵐 수 없을 것”이라고 이유를 들었다. 97년 12월 10일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정계에 들어갔다. 이듬해 4·2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에 투입돼 국회의원이 됐다.

 그러나 총재직 폐지, 당권·대권 분리 등을 요구하며 당 총재이던 이회창과 마찰을 빚어 2002년 2월 탈당을 결행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그해 5월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과 단독 면담했다. 당시 김정일은 박근혜에게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했던 68년의 1·21사태를 거론하며 “극단주의자들이 일을 잘못 저질렀다.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박근혜는 2002년 11월 한나라당에 9개월 만에 재합류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대선에서 패배했고 뒤이어 차떼기 사건 수사에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까지 겹쳐 2004년 4월 총선을 목전에 두고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박근혜는 그해 3월 23일 전당대회에서 새 당 대표로 뽑혀 구원투수로 나섰다. 그는 대표 취임 직후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 부지에 천막을 치고 당사로 삼았다. 그러곤 전국을 누비며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겠다”고 호소해 121석을 얻으며 당을 기사회생시켰다. 천막당사는 한나라당 상징물로 기억됐고 박근혜는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그는 3년여 동안 야당 대표를 지내면서 각종 재·보선에서 승리했다. 2006년 5월 20일 박근혜는 서울 신촌로터리 지방선거 유세 도중 오른쪽 뺨이 커터칼에 의해 11㎝나 찢기는 테러를 당하면서도 병원에서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어 지지층을 단결시켰다.

유례없는 대혈전이었던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그는 이명박에게 패했다. 그러나 패배에 승복하고 대선에서 이명박 지원유세에 나섰다. 하지만 둘은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정면충돌했다. 공천에서 측근들이 대거 낙천하자 정당 사상 유례가 없는, 개인의 이름을 사용한 ‘친박연대’가 등장했다. 이때 박근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살아서 돌아오라”며 이들을 간접 후원했다. 2011년엔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선 패배로 또다시 수세에 몰리자 박근혜는 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비대위와 2012년 총선 공천을 거치면서 당권은 박근혜계로 넘어왔고, 이명박계는 사실상 와해됐다. 정계 입문 15년 동안 그는 과거 3김(金)과 맞먹는 열성 지지층을 가진 ‘정당의 오너’가 됐다. 동시에 비토 그룹의 거부감도 그만큼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