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휘둘린 과학.. 수천억대 가속기가 천덕꾸러기로

2016. 11. 1. 17:44이슈 뉴스스크랩

정치에 휘둘린 과학.. 수천억대 가속기가 천덕꾸러기로

한국일보 | 임소형 | 입력 2016.11.01. 04:42

원자력硏 양성자가속기

3100억 투자… 물질 변환 용도

이용자수 방사광가속기 ⅛수준

원자력의학원 중입자가속기

분담금 내지 못해 가속기는 없이

965억원 들여 건물만 ‘덜렁’

이미 4,000여억원이 투입된 대형 연구시설인 양성자가속기와 중입자가속기가 기대만큼 이용되지 않아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 학계의 공감대보다 정치적 목적으로 건설이 결정된 탓에 예산만 허비했다는 게 과학자들 지적이다.

31일 과학계에 따르면 3,100억원을 들여 경주 건천읍에 지은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양성자가속기를 지난해 이용한 연구자는 581명에 그쳤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우수 학술지(SCIㆍ과학기술인용색인)에 관련 논문이 실린 것도 30여편에 그쳤다. 이는 1995년 건설된 포항 방사광가속기(3세대)의 지난해 이용자가 4,640명, SCI 논문이 451편인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실적이다. 양성자가속기가 방사광가속기보다 활용 분야가 다소 좁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용이 너무 적다는 평가다. 조용섭 원자력연 양성자가속기연구센터장은 “계획보다 예산이 많이 삭감돼 최종 규모(에너지 세기)가 미국, 일본의 10분의 1로 줄어 연구 범위도 그만큼 축소됐다”고 밝혔다.

경주에서 운영 중인 양성자가속기의 일부분. 활용 연구 분야가 애초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제공
경주에서 운영 중인 양성자가속기의 일부분. 활용 연구 분야가 애초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제공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가속시켜 나오는 빛으로 물질 내부를 관찰하고, 양성자가속기는 가속한 양성자(원자를 구성하는 입자)로 물질을 변화시킨다. 양성자가속기가 설치되면 단백질 분석 등 생명과학 분야에서 두 설비의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됐다. 방사광가속기는 단백질을 구성하는 무거운 원소를 분석하는데 유리하고, 양성자가속기는 가벼운 원소 분석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경주 양성자가속기는 에너지가 약해 단백질 분석이 어렵다.

부산 기장군의 한국원자력의학원 중입자가속기 치료센터에는 아예 가속기가 없다. 2010년부터 중앙정부와 부산시, 기장군이 투입한 965억원으로 건물만 지어 놓았다. 의학원이 내야 할 분담금 750억원이 확보되지 못해서다. 중입자가속기는 탄소 입자를 가속시켜 나온 에너지로 암세포를 파괴하는 설비다. 외국에 없는 새 기종(사이클로트론)의 중입자가속기를 개발하겠다던 의학원은 2014년 개발을 중단하고 중국 일본 독일 등이 운영하는 것과 같은 기종(싱크로트론)을 만들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이신재 의학원 기획행정팀장은 “신기술 개발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빨리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사업을 변경했다”며 “지역 병원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분담금 마련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양성자가속기와 중입자가속기는 지자체가 유치에 적극적이었다. 경주시는 양성자가속기로 수백명의 고용 유발과 지역경제 활성화가 기대된다고, 기장군은 중입자가속기 일대를 동북아 암 진료 특구로 육성하겠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양성자가속기 연구센터에는 현재 40여명이 근무 중이고, 중입자가속기는 들어설 수 있을지 조차 불투명해졌다. 중ㆍ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시설 건설과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 수명 연장을 위해 지역에 정치적 ‘보상’ 성격으로 건설해준 뒤 이후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1,000억원 가까이 들였는데 건물만 지어진 부산의 중입자가속기 치료센터. 지난 6년간 한국원자력의학원은 분담금도 못 냈고 개발 계획도 변경했다. 한국원자력의학원 제공
1,000억원 가까이 들였는데 건물만 지어진 부산의 중입자가속기 치료센터. 지난 6년간 한국원자력의학원은 분담금도 못 냈고 개발 계획도 변경했다. 한국원자력의학원 제공
대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핵심 연구시설로 계획된 중이온가속기 조감도. 건설 필요성에 대해 논란이 여전하다. 기초과학연구원 제공
대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핵심 연구시설로 계획된 중이온가속기 조감도. 건설 필요성에 대해 논란이 여전하다. 기초과학연구원 제공

대전 유성구에 짓고 있는(공정률 29.85%) 중이온가속기에도 곱지 않은 시선이 쏠린다. 1조4,298억원이 들어갈 이 가속기마저 중입자나 양성자 가속기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다. 중이온가속기는 무거운 금속 입자(이온)를 가속시켜 희귀한 원소를 만들어내는 설비다. 한 물리학자는 “중이온가속기를 사용할 국내 연구자는 학생 포함 200명도 안될 것”이라고 한탄했다. 한 화학자는 “학계와의 논의 없이 정치권과 연결된 일부 과학자들 목소리만 극대화한 결과가 바로 가속기”라고 꼬집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