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21. 17:56ㆍC.E.O 경영 자료
[월간중앙] ‘DJ·박근혜 비서실장’ 한광옥의 苦言
[중앙일보] 입력 2020.01.21 15:52 수정 2020.01.21 15:53
■ “문 대통령 현실과 거리 먼 내용의 보고 받는 건 아닌지”
■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은 정치 재판… 탄핵까지 갈 일이었나”
단독 인터뷰 “독주 체제 文 정권··· 폭주로 이어질까 두려워” |
■ “41.1%로 당선됐더라도 100% 국민 보고 가야”
■ “정치 제대로 못하면 원민(怨民)이 호민(豪民)으로 변해”
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정치 원로로서 무엇보다 국민 분열이 가장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며 정치권의 각성을 촉구했다.
‘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DJ(김대중 전 대통령). 한 전 실장은 국민의정부 두 번째 비서실장으로 발탁돼 DJ를 보필했다.
한 전 실장과 DJ의 인연은 3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10월 7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당시 한광옥 민한당 초선 의원은 DJ 석방, 광주 진상 조사 및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해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 발언 이후 6개월 동안 국가 정보기관의 내사(內査)를 받았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제가 꺼냈기 때문이죠. 1984년 DJ가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동교동으로 인사를 갔더니 저를 골방으로 부르시더군요. 그러면서 ‘나와 내 가족 모두가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라며 저를 ‘한 동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제게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대변인을 맡기시더라고요.”
대표적인 ‘DJ맨’이지만 한광옥 전 실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도 보좌했다. 2012년 새누리당 대선 캠프에 합류한 그는 국민대통합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을 맡았고, 정권 출범 이후로도 줄곧 국민대통합위원장직을 수행했다.
그러다 박근혜 정부 말기이던 2016년 11월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한 전 실장은 2017년 3월 박 전 대통령이 탄핵 당해 권좌에서 내려온 뒤로도 청와대에 남아 소임을 다했고, 같은 해 5월 정권교체와 함께 청와대에서 나왔다.
월간중앙이 세계 정치사에서도 드문 ‘두 대통령의 비서실장' 한광옥 전 실장과 처음 만난 건 2019년 7월 18일이었다. 월간중앙의 인터뷰 요청에 한 전 실장은 “아내가 10년가량 폐암 투병 중이라 내가 ‘수간호사’ 역할을 해야 한다”며 정중히 고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입을 열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월 15일, 월간중앙이 서울시내 모처에서 한 전 실장과 다시 만났다. 90여 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한 전 실장은 구체적인 거명(擧名)은 자제하면서도 나라와 국민을 걱정하는 격정(激情)은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는 “진보·보수를 떠나 대통령의 불행은 나라의 불행이요, 국민의 불행”이라며 “입법부·행정부·사법부를 모두 장악한 이 정권이 제도적으로 독주 체제를 만들었는데 폭주로 이어질까 두렵다”고 탄식했다.
“대통령의 말씀, 국민과 너무 괴리돼 있어”
2016년 11월 18일 청와대에서 거행된 신임 정무직 임명장 수여식에서 함께한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아내가 폐암 투병을 한 지 10년쯤 됐다. 젊어서 정치 한다고 돌아다닐 때 아내 속을 참 많이 썩였다. 그래서 지금은 많은 시간을 아내 보살피는 데 쏟고 있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과거 동지들과 만나서 조언하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내가 노사정위원장·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 상임의장·국민대통합위원장 등 여러 가지 일을 해서 그런지 만나서 이야기 나눌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청와대를 나온 지 3년 가까이 됐다. 청와대 밖에서 바라보는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임명해서 청와대 비서실장을 하긴 했지만, 나는 정치인이지 원래 참모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청와대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늘 우리 정치·사회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 갈수록 청와대가 경직되고 권위적으로 변해 가는 것 같다. 대통령의 말씀이나 청와대의 논평을 보면 국민과 너무 괴리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 국민을 보면 저렇게까지 분노할 게 아닌데(감정이) 좀 과하지 않나 싶을 때가 있다. 국민이 분열돼 있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광화문에 가서, 어떤 사람들은 서초동에 가서 집회를 열지 않나? 이런 갈등을 보면 너무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가 ‘DJ맨 한광옥’이 어떻게 박근혜 정부에서 일하게 됐냐는 거다.
“어찌 보면 그건 당연한 거다. 내가 모셨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정치는 상대방을 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다. 오랫동안 백인들에게 탄압받았던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같은 사고라고 할까? 생전에 김 전 대통령은 ‘만델라 같은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포용과 용서가 김 전 대통령의 정치철학이다. 2004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동교동을 방문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아버지 시절 여러 가지로 피해를 보시고 고생한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드린다. 또 김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결정한 데 대해서도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 전 대통령은 ‘기념관 문제를 푸는 데 최대의 정적(政敵)인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역사적 공과(功過)는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국민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나는 동서화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내가 못한 일을 박 대표가 해달라. 박 대표가 제일 적임자’라고 덕담을 해주셨다. 박 대표가 방문한 다음 날 김 전 대통령이 나를 부르시더니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과를 받은 것 같다’며 무척 좋아하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일로 해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적으로는 화해한 셈이 됐다.”
박 정부의 질서 있는 퇴진 위해 비서실장직 수락
2001년 8월 청와대의 한 행사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캠프에 합류했는데.
“사실 김용환 전 의원의 권유가 있었다. 그 선배는 1997년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때 1년 5개월가량 함께 협상을 진행하면서 인간적으로 신뢰를 쌓았던 분이다. 참 배울 점이 많은 선배였다. 그분이 나에게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국민대통합위원회도 맡고 박근혜 후보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국민 통합을 위한 일이라면 하겠다’고 답했다. 박근혜 후보는 예전에 동교동으로 찾아와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과하지 않았나? 그걸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박근혜 후보 캠프로 들어갔을 거로 생각하더라. 그런데 그런 일을 갑자기 맡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과정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된 거지. 김용환 전 의원, 박근혜 후보와 셋이 만난 자리에서 얘기를 나눴고 (박근혜 후보 캠프 참여를) 수락하게 된 것이다.”
2016년 11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박근혜 퇴진론까지 고개를 들 때 아니었나?
“당시 국민대통합위원장으로서 임기가 남아 있을 때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박근혜 대통령이 궁지에 몰리더라. 그리고 주위에서 ‘당신이 청와대에 들어가서 대통령을 좀 도와 드렸으면 좋겠다’는 권유도 많았던 게 사실이다. 직전 비서실장이었던 이원종 전 실장이 ‘차 한잔하자’고 하길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합석해서 ‘도와주시라’고 하더라. 기본적으로 ‘어려운 사람은 도와야 한다’는 게 어려서부터 지켜온 내 철학이다. 이건 다른 얘기지만 내가 새천년민주당 대표일 때 노무현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그때 국민경선제를 도입하지 않았다면 이인제 전 의원이 대선후보로 선출되지 않았을까? 대선에서 우리 당이 이기기 위해 그런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후보는 대선에서 당선되더니 열린우리당을 만들어서 당을 깨고 나가버렸다. 그때부터 나와 틀어졌다. 그래서 우리 역사가 이렇게 갈라진 건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5년 단임 대통령제도 문제다. 4년 연임제라면 4년을 더하기 위해 앞선 4년 동안 열심히 하겠지. 그런데 5년 단임제는 잘하든 못하든 5년 후면 내려와야 하니까 마지막에 막장이 돼버린다. (대통령의) 친인척이나 참모 중에 불행한 사람이 나오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아들들 때문에 마지막에 잘못된 것 아니었던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 탈당 원서를 받은 사람이 바로 나다. 그 심정을 누가 알까? 그런 걸 겪었던 나니까, 5년 단임제의 임기 말을 맞은 박근혜 전 대통령도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다. 박 전 대통령이 물러나더라도 평화롭고 질서 있게 퇴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을 도와 드리기 위해 (청와대로) 들어갔던 거다. 그런데 내 뜻대로 안 되더라.”
“국민 입장 고민했던 3金에게 배워야”
2001년 9월 아시안게임 성공 기원 팔관회 행사에서 자리를 함께한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한광옥 새천년민주당 대표, 김종필 자민련 총재(왼쪽부터).
지근(至近)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모셨다. ‘대통령 박근혜’를 어떻게 평가하나?
“짧은 기간(4개월) 모셨기에 솔직히 말하면 심층적으로 분석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일단은 매우 신중한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대화를 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던 것 같다. 소외감을 느낀 사람들은 가끔 불평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그분의 국가관은 굉장히 투철했다. 그런 면에서 나름대로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 등 여러 방면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던 것 같았다.”
최서원(이전의 최순실) 문제를 알고 있었나.
“나는 알 수가 없었지. 그래서 (청와대에 들어간 다음에) 비서들한테 물어봤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 그래서 비서실장 되고 나서 처음 수석비서관 회의 소집 때 ‘최순실 문제는 확실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수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 재판에 가본 적이 있는지.
“물론 가봤다. 참 마음이 안 좋더라. 그래도 그분은 의연하시더라. 그런 모습을 보면서 ‘꼭 재판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생각도 들더라.”
재판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는가?
“그걸 내가 어떻게 예상하겠나? 또 그건 내가 말할 게 아닌,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다만 나는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은 정치 재판이라고 생각한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까지 당할 일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심판에는 역사적·국민적·법적 심판이 있지만 탄핵까지 당할 대통령은 아니었다는 게 내 소신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751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768일 수감돼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통령은 벌써 1000일이 넘었다. 이제는 석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재판을 받더라도 불구속 상태에서 받도록 해야 한다.”
과거 민추협 시절에는 상도동과 가까웠고, DJP 연합 때는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와 자주 만났다. 3김(金)에 대해 평가한다면.
“YS(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먼저 말하겠다. 민추협은 상도동과 동교동에서 공동의장을 맡았기 때문에 (성명서 같은 걸 발표하려면) YS와 DJ의 서명이 모두 들어가야 했다. 그때는 우리 집이 관악구 봉천동이었는데 성명서 한 장 가지고 상도동 갔다 동교동 갔다 그러던 시절이었다. 상도동에 가면 YS는 늘 대문 앞까지 나와서 ‘한 대변인 수고 많습니다’라며 직접 배웅해 주셨다. 인간미가 있었던 분이지. 정치적으로는 결단력이 대단한 분이었다. 또 어렵고 복잡한 일을 단순화시키는 능력도 엄청났다. 크게 눈 한번 감았다가 뜨면 결론이 나오는 분이었다. DJ는 논리적이고 정책적이었다. 물론 DJ도 인간미가 넘치는 분이었다. 무엇보다 그분은 포용력이 대단했다.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대한민국 산업화에 공적이 큰 분이었다. 또 JP는 정치인이면서도 문화적·예술적 감각이 대단했다. 그분과 대화하면 늘 재미있었고 배울 점이 많았다. 독서량이 엄청났기 때문에 지식이 풍부했다. 특히 고사성어는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다. 3김은 방법과 콘텐트는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투철한 자유민주주의적 국가관이다. 그리고 국민 여론을 매우 중시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국민이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이 많았다. 3김이 국민 여론을 중시하고 국민 입장에서 생각했다는 건 이 시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말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경쟁자를 惡으로 규정하는 정치는 잘못”
2000년 6월 당시 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김영삼 전 대통령을 공항 귀빈실로 찾아가 인사하고 있다.
DJP 연합은 매우 이질적인 정치 세력의 연대였다. 어떻게 해서 그런 프로젝트가 추진됐나?
“DJ는 앞선 세 차례의 대선 도전에서 모두 실패했고 1997년 마지막 도전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내가 ‘새정치국민회의 범야권 대통령후보단일화협상 추진위원장’을 맡게 됐다. DJ로서는 전략적으로든 정략적으로든 다른 세력과의 연대가 절실했다. 툭하면 보수진영 일각에서 DJ에게 색깔을 덧씌울 때 아니었나. 그래서 DJ에게 JP가 더욱더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1996년 봄부터 김용환 전 의원과 내가 물밑에서 접촉하기 시작했다. 협상을 진행하면서 김용환 전 의원과 신뢰가 쌓여갔다. DJP 연합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라 최소한 1년 5개월쯤 걸린 대장정이었다. DJP 연합의 최대 걸림돌은 자민련이 요구하는 내각제였다. 그때만 해도 우리 당에서 내각제를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지율 5%짜리 당에 지분의 절반을 내주면서까지 연대해야 하느냐’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오랜 고민 끝에, 몹시 어렵게 자민련의 내각제 요구안을 보고했는데 DJ는 의외로 ‘나도 말이야, 사실은 내각제가 괜찮다고 생각해’라고 하시더라. 그렇게 해서 내각제를 전격 수용했고, DJP 연합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정당 입장에서 대선 후보를 양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민련으로서는 큰 결단을 내린 것이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79석에 그쳤고 DJ의 대선가도에는 적신호가 들어왔다. 이에 DJ의 싱크탱크였던 아태평화재단(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의 이강래 상임고문이 호남 고립 구도 타파 책으로 JP와의 연대를 DJ에게 제안했다. DJ는 이를 수용하고 당시 한광옥 사무총장에게 ‘특명’을 내렸다.
한 사무총장의 자민련 측 파트너는 김용환 사무총장이었다. DJP 연합의 합의 내용은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로 하고 초대 국무총리는 김종필 총재로 한다 ▷제16대 국회에서 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합의하며 실세형 총리로 한다 ▷경제부처의 임명권은 총리가 가지며 지방선거 수도권 광역단체장 중 한 명을 자민련 소속으로 한다 등이었다.
현 정권의 문제점으로 진영 정치와 편 가르기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크다.
“사실 편 가르기라는 건 정치의 본질에서 크게 어긋나는 일은 아니다. 독일의 정치 이론가인 칼 슈미트는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슈미트가 말하는 적은 선의의 경쟁자를 의미한다. 적이라고 해서 악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적의 개념과는 다르다. 지금 우리 정치는 동지=선, 경쟁자=악이라고 보고 있다. 이런 논리를 대입해 보면 지금 우리 정치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이분화하다 보니 상대방 목소리는 들으려 하지 하는 것이다. ‘조국 사태’ 이후로도 서초동으로 간 사람은 그쪽 사람들 말만 듣고, 광화문으로 간 사람들은 또 그쪽 사람들 말만 들으려 한다. 현재 우리 정치에서 나타나는 진영 정치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친노·친문 진영 논리가 국가 분열 초래했을 수도”
1998년 2월 대타협 공동합의문을 발표하는 노사정 대표들. 왼쪽부터 당시 임창열 경제부총리, 김창성 한국경영자총협회장, 한광옥 노사정위원장, 박인상 한국노총위원장,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진영 정치의 원인으로 친노·친문의 지나친 동류의식 또는 패권주의를 꼽는 이들도 있다.
“친노든 친문이든 그들의 진영 논리가 현재 국가의 분열을 초래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40여 년 동안 정치를 해왔는데 지금처럼 갈라진 적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집 안에서도 부모와 자식이 갈라진다고 하지 않나. 한쪽에서는 지상파 방송만 보고, 다른 한쪽에서는 유튜브만 본다. 양쪽 의견을 다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쪽 말만 들으려 한다. 이런 문제를 빨리 해소하지 않으면 나라가 굉장히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리 정치가 잘못되고 국회가 제 역할을 못한다 해도 우리 국민은 현명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걸어온 길을 보라. 고비마다 국민이 바로잡아줬다. 586(5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들만 민주화운동 했나? 나도 60년대에 학생운동 하다가 두 번이나 감옥에 다녀왔다. 그게(민주화운동 경력이) 마치 대단한 훈장처럼, 자신들의 논리가 절대적인 양하는 건 곤란하다. 입법부·사법부·행정부를 다 장악했는데, 그렇다면 절대권력을 누리겠다는 건가?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모르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삼권분립이 왜 있을까? 서로 견제하라는 거다. 그런데도 저렇게 절대권력을 쥐겠다고 하니….”
87년 민주화 이후 요즘처럼 여야의 대립과 반목이 심했던 때가 있었던가.
“(손사래를 치며) 없었다. 예전에도 여야 간 정쟁은 있었지만 대화는 했다. 대화라는 건 서로 진심을 주고받는 거다. 그게 없으면 정치가 안 된다. 낮에 국회에서는 싸우더라도 저녁에 식당에서 만나 소주 한잔하면서 서로 대화하고 그랬다. 정치도 사람이 하는 거다. 다들 정치적 이유도 있을 테고 진영 논리도 있겠지. 그래도 서로 협치(協治)를 통해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하는 것 같다. 국민의정부에서 내가 노사정위원장으로 일할 때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어렵게 합의했는데 기자회견 30분 전에 민주노총에서 ‘안 되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민노총에 ‘국가가 있어야 기업이 있다. 기업이 있어야 직장도 있다. 국가가 부도 나면 기업이 없어지고 직장도 없어진다. 그러니 같이 살자’고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노사정 대타협이 탄생한 거다.”
1월 14일 문재인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을 보셨는지.
“대통령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내용의)보고를 받는 게 아닌가 우려됐다. 이미 제도적으로 독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놨는데, 저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폭주(暴走)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모든 걸 낙관적으로 이야기하는데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 갈등도 너무 심하다. 지금 우리 국회가 제 역할을 하고 있나? 대통령은 현실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귀를 열어놓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또 무엇보다 대통령은 정직해야 한다. 사과할 건 사과해야 한다. YS나 DJ도 자식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사과하지 않았나. 대통령은 국민의 대통령이다. 41.1%의 지지를 받고 당선됐더라도 국민 100%를 보고 정치해야 한다. 그런데 41.1%만 보고 정치를 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게 바로 진영 정치다. 대통령은 눈물로 호소할 건 눈물로 호소하고, 국민에게 요구할 건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국민 앞에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뭔가.”
“정략적 협치라면 안 하느니만 못해”
1997년 10월 31일 DJP 합의문을 발표하는 당시 한광옥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오른쪽)과 김용환 자민련 사무총장.
정세균 국무총리는 인사청문회에서 ‘4·15 총선 후 대통령에게 여야 협치 내각 구성을 건의하겠다’고 했다. 협치 내각의 필요충분조건은 뭘까?
“정세균 총리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잘해 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다만 협치가 어느 한쪽의 정략에 의한 것이라면 아니한 것만 못하게 된다. 협치를 하려면 각 당과 충분히 이야기해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야당에 ‘장관 자리 하나 맡아 달라’는 식이라면 정략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그런 협치라면 안 하는 게 낫다. 내가 노사정 위원장일 때 정 총리가 위원으로 일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친분도 있다. 성품이 온화하고 자세가 유연해서 총리로서 역할을 잘할 것으로 본다.”
청와대 비서실장은 어떤 자리인가?
“1999년 가을 어느 일요일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날더러 청와대로 잠시 들어와 달라고 하시더라.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비서실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지 6개월밖에 안 됐을 때라 솔직히 비서실장을 맡고 싶지 않았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나도 내 영역에서 리더가 되고 싶었지 참모가 되고 싶진 않았다(웃음). 그래서 대통령에게 ‘일주일만 여유를 주시라. 지역민들에게 이야기하고 오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통령이 이미 눈치를 채시고 ‘아니야, 내일부터 당장 출근해요. 공관(公館)은 비어 있어요’라고 하시더라. 그렇게 해서 비서실장을 맡게 됐다. 당시는 옷 로비 사건으로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어려울 때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곤경에 처했을 때 내가 대통령 비서실장직을 수락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주면 좋겠다. 비서실장은 정치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의 참모일 뿐이다. 비서실장의 모든 행위는 대통령을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과 수석비서관들, 또 수석비서관들 간의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 때로는 대통령을 위해서 직언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호가호위(狐假虎威)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어떤 수석비서관들은 자기들이 직접 언론에도 등장하더라. 그런 건 안 된다. 비서들이 그렇게 나서면 내각은 뭘 해야 하나. 할 일이 없어진다. 내각이 일을 잘할 수 있게 돕는 것도 비서들의 중요한 역할이다.”
옷 로비 사건이란 1999년, 당시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고 있던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고위층 인사의 부인들에게 고가의 옷 로비를 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의 조사를 위해 사상 최초로 특별검사제도가 도입됐다.
“정부도 국회도 헌법 정신 되새겨라”
1999년 3월 30일 실시된 서울 구로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한광옥 후보(가운데).
20대 국회가 사상 최악이라는 비판이 많다. 정치 선배로서 조언이 있다면.
“나도 이런 국회는 처음 봤다. 20대 국회는 앞으로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될 것 같다. 이런 국회로 전락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민주화를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했지만 민주주의자가 되는 연습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국민은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데 정치권은 국민의 정치의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되레 퇴행하고 있다.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을 처리하겠다며 4+1 연합체라는 게 생기던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군소정당들이 선거법 고쳐서 몇 석이라도 더 얻으려고 더불어민주당과 야합하다 보니 그런 이상한 게 생긴 것 아닌가. 그런 정치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또 정치인은 포퓰리즘(대중인기 영합주의)을 경계해야 한다. 표를 얻기 위해 포퓰리즘에 빠지다 보면 결국 독재로 흐르게 된다. 요즘에 가만히 보면 세금 가지고 돈 나눠 주기를 좋아하던데 그걸 누가 못하나. 그거 좋아하다간 우리도 베네수엘라나 아르헨티나처럼 될 수 있다. 정치인이라면 정치를 왜 하는지 반드시 정치철학이 있어야 한다. 정치는 국가·사회·약자를 위해서 해야 한다. 하나의 직업으로, 생계형 국회의원이 되려 하면 안 된다. 잘 살펴보면 자기 철학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시의원·도의원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더 큰 기회를 줘야 한다. 또 일본의 마쓰시타 정경숙(松下 政經塾) 형태는 아니더라도 정당 산하에 연수원 같은 걸 만들어서 정치인을 제대로 길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총선 때만 되면 갑자기 쇼하듯 외부 인사 영입 경쟁을 한다. 그걸 보는 국민은 부글부글 끓는다.”
이 대목에서 한 전 실장은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을 역설했다. “백성에는 항민(恒民)·원민(怨民)·호민(豪民)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잘하나 못하나 그냥 복종하는 게 항민이고, 원망만 하는 게 원민이다. 호민은 바꿔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다. 지금처럼 정치를 잘못하면 항민이 원민이 되고, 원민이 호민이 된다. 우리 국민은 이미 항민을 지나 원민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정부와 국회가 헌법 정신에 맞는 제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마음에 새기고 있는 잠언(箴言)이 있는지.
“상선약수(上善若水)와 해불양수’(海不讓水) 그리고 덕치정도(德治正道)란 말을 깊이 새기며 산다. 최고의 선은 물이다. 바닷물은 겸손하게 모든 물을 사양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인 짠맛을 잃지 않는다. 또 정치는 덕을 가지고 바른길을 가는 것이다.”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어느덧 내 나이도 80세에 가까워졌다. 이제는 후배들이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버팀목 역할을 하고 싶다. 영화에서 주연만 중요한 게 아니라 조연도 중요하다. 훌륭한 조연은 주연 못지않은 가치가 있다. 또 정치인으로 40여 년을 살았는데 아름다운 퇴장을 위해 마무리도 잘하고 싶다.”
인터뷰가 갈무리될 무렵 한 전 실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 “정부는 헌법을 다시 한번 읽어 보고 헌법 정신에 맞게 나라를 이끌어 주기 바란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국회는 행정부의 부속기관이 아니다. 국회 역시 헌법 정신에 맞게 제대로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박종근 비주얼에디터 jokepark@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월간중앙] ‘DJ·박근혜 비서실장’ 한광옥의 苦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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