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이렇게 뒤흔들 줄이야” 박정희와 독대 담판[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2022. 8. 28. 15:04C.E.O 경영 자료

“나라를 이렇게 뒤흔들 줄이야” 박정희와 독대 담판[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최영해기자

동아일보 입력 2022-08-28 09:00업데이트 2022-08-28 09:43

 

이희건 신한은행 창업주 스토리 2
“조국의 경제 재건에 기여해주십시오!”
박정희 대통령과의 독대 담판
“은행 설립 자본은 모두 재일교포들이 대겠습니다.”
2022년 7월 7일 신한은행이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1982년 일본 전역의 재일교포 주주 341명으로부터 돈을 모아 만들어진 신한은행의 탄생은 이희건 창업주의 노력 없이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현해탄을 건너 사회의 밑바닥 사환에서 시작한 이희건의 삶을 들여다 본 ‘여러분 덕택입니다. 신한은행 창업주 이희건 회고록’(나남)이 최근 발간됐다. 2011년 작고한 조선 청년 이희건의 불굴의 삶을 추적, 8월14일에 이어 두 번째로 소개한다.

“의장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1961년 10월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 간부가 이희건이 묵고 있던 서울 반도호텔을 찾아왔다.

같은 해 5월 16일 군사정변으로 윤보선, 장면 정부가 무너지고 박정희 육군 소장의 사진이 여러 일본 신문에 보도된 때였다. 검은 선글라스를 쓴 박정희라는 이름을 보고 이희건은 1932년 대구사범학교 입시 준비 때 룸메이트가 퍼뜩 떠올랐다. 바로 그 박정희였다!

신문기사를 보니 박정희는 대구사범 졸업 후 경북 문경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만주군관학교로 진학했고, 군관학교 성적 우수자로 일본 육사에 편입해 졸업한 것으로 돼 있었다.

“그 박정희가 이렇게 군인이 돼 나라를 뒤흔들 줄이야…”

희건은 머지않아 한국에 큰 변화가 생길 것으로 짐작했다. 박정희의 ‘혁명공약’ 기운데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이란 조항이 들어있었다. 혁명주체 세력은 ‘조국근대화’를 지상명제로 내걸었다. 희건은 1961년 10월 28일 오사카 상공인을 주축으로 한 재일교포경제인 50명으로 모국경제시찰단을 결성해 서울에 들어온 터였다.

●박정희와 29년 만의 재회

1961년 11월 25일 방미 일정을 마치고 귀국 인사를 하는 박정희 의장. 동아일보 DB

“이게 몇 년 만입니까? 반갑습니다!”

남산 기슭의 의장 공관에 가서 만난 박정희 의장은 검은 색 선글라스를 벗으며 희건을 맞이했다. 무려 29년 만이었다.

“그 때는 희(熙) 자, 문(文) 자를 쓰셨는데, 개명을 하셨나요?”

“일본에 가면서 희(熙) 자, 건(健) 자로 바꿔 씁니다.”

“요즘도 남자 이름에 희 자를 쓰면 희귀한데 우리 어릴 때는 더더욱 그랬지요. 그 하숙방에서 그런 얘기 나눈 게 기억이 납니다.”

“의장님은 합격하셨고, 저는 낙방했잖습니까? 제가 합격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봅니다.”

“합격했어도 지금만큼 성공하신다는 보장이 없을 겁니다. 하하하!”

“아직은 큰 성공이 아닙니다. 앞으로 더 뛰어야 합니다.”

“한국에 투자를 많이 해 주십시오. 한국에 오시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희건은 박 의장에게 재일교포 금융회사가 일본에 산재된 신용조합으로 그칠 게 아니라 재일교포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은행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일본 안에서 재일교포 투자은행을 설립하려는 안건은 한일 수교협상에서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한 종자돈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을 최대한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재일교포의 일본 내 체류 자격과 권리 문제에 대한 논의는 뒷전이었다.

●“조국의 경제 재건에 공헌해 주십시오!”

1961년 12월 7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동아일보 DB

박정희 의장은 정권을 잡긴 했지만 경제개발을 위한 투자자금이 없어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기댈 곳은 재일교포에게 모국 투자를 적극적으로 종용하는 것이었다. 1961년 12월 20일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은 권일 단장을 대표로 재일교포 기업인 61명이 프로펠러 전세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을 만난 박정희 의장은 “재일동포 여러분! 조국의 경제 재건에 공헌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박 의장의 논리 정연한 비전 제시에 재일교포 기업인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듬해 박정희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선포했다.

재일교포의 모국(母國) 투자는 점차 늘어나 1970년대 초반 모국 투자 기업 수는 200개를 넘었다. 그러나 비즈니스 환경은 일본 못지않은 차별투성이였다. 사업 인허가, 세무, 회계, 수입통관 등 관공서 업무는 온갖 규제로 얽매여 있었다. 실무 현장에서 공무원들의 횡포가 극심했다. 모국에 투자했다가 호되게 고생하고 사업을 접은 재일교포 사업가들이 속출했다. 당초 약속한 토지 무상제공, 소득세 재산세 출자금배당금 면세라는 약속은 법률 개정으로 하루아침에 투자 혜택을 폐지한다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사업가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들이야)!”

“일본에서 겪던 차별보다 더 고약하지 않아?”

●대출금의 20%를 커미션으로 내야 한다니

1971년 5월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김해유세장에서 청중 속에 들어가 아기를 안고 있는 박정희 공화당 총재. 사진 동아일보 DB

금융 장벽도 만만찮았다. 급하게 운용 자금이 필요할 때 은행 대출은 거의 불가능했다. 내국인 기업조차 대출 받는 것은 특혜이던 시절이었다. 대출 승인이 나도 원금의 20%를 커미션으로 바쳐야 했다. 한국 정부는 재일교포들에게 투자를 권유했지만 정작 금융은 막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각자도생의 시기였다.

일본에서는 1973년 들어 모국 투자가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도쿄를 비롯해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등 일본 전역의 모국 투자자들이 동참했다. 마침내 1974년 2월 5일 오사카 재일한국인상공회 사무실에서 ‘재일한국인모국투자기업연합회가 발족했다. 초대 회장에 이희건을 추대했다.

“아시다시피 모국에 진출한 우리 동포들이 투자 시작 단계에서부터 금융 제한 등 갖가지 애로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 협회는 이런 문제 뿐 아니라 장차 모국에 진출하려는 기업인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것입니다. 두 어깨가 무겁습니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재일교포 사회 뿐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거상(巨商)으로 인정받는 쟁쟁한 기업인들이 참여했다. 신격호(롯데) 서갑호(방림방적) 허필석(YC안테나) 김용태(한국마벨) 안재호(대한합성화학) 강병준(삼화제관) 등의 기업인들이 부회장과 고문 등으로 추대됐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독대 담판

1940년대 중후반 개업한 마작게임장 평락장 앞에서 직원들과 찍은 사진. 가운데 검은 양복 상의를 입은 이가 이희건. 사진 나남

1977년 청와대에서 만난 박정히 대통령은 초췌해보였다.

3년 전 광복절에 사별한 육영수 여사가 곁에 없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겉으로는 박 대통령은 쾌활한 웃음으로 희건을 맞아주었다. 으레 대구 하숙집 얘기로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각하! 재일교포가 모국에서 사업을 할 때 금융 문제 때문에 애로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대로라면 재일교포들의 모국 투자는 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잘 알고 있어요. 해결책은 뭡니까?”

“은행 설립입니다. 자본은 모두 재일교포들이 대겠습니다.”

“은행이라…”

한참 말이 없던 박 대통령은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김용환 재무부 장관을 불렀다. 정통 재무관료인 두 사람은 한 목소리로 시기상조론을 내세웠다. 당시 시중은행은 국가 기간산업 설비자금을 빌려줄 때 예금금리보다 낮은 정책금리를 적용했다. 정부가 재정에서 역(逆)금리를 일부 보전해주지만 시중은행들은 부실기업에 거액을 떼이기도 해 적자에 허덕였다. 은행 주가가 액면가를 밑도는 이유였다.

남덕우 부총리가 희건을 설득했다.

“재일동포들을 위해서라도 은행 설립은 위험이 크니 다른 방안을 찾아보시지요.”

“어떤 방안이 있겠습니까?”

“다른 형태의 금융회사로 출범하면 좋겠습니다.”

●단자회사 제일투자금융의 탄생

1977년 8월 10일 설립한 제일투자금융 개업기념식. 사진 중앙 안경 쓴 이가 이희건. 사진 나남

그래서 설립된 것이 제일투자금융 주식회사다.

단자(短資)회사다. 1년 이내의 단기자금을 운용하는, 대부업에 가까운 업태(業態)다. 예금금리가 높아 큰손들이 뭉칫돈을 맡기면 대출도 주로 대기업에 고금리로 빌려줘 수익성도 높았다. 단자사 설립 허가가 큰 이권이던 시기였다. 1977년 7월 19일 ’재일교포들의 자금력을 본국 투자로 결집시킨다는 목표 아래 처음으로 모국에 재일교포 금융회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수권자본금 60억원, 납입자본금 30억원으로 1977년 8월 10일 문을 열었다.

창립 주주는 재일교포 125명으로 단출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납입자본금을 50억원으로 늘려 한국 최대의 단자회사가 됐다. 주주수도 475명으로 4배로 불어났다.

“재일교포 모국 투자가들로만 구성합니다. 특정 주주가 주식을 많이 보유할 수 없습니다. 가급적 여러 재일교포들이 폭넓게 경영에 참여하도록 합니다. 우리 회사는 ‘대중의 공기(公器)’를 지향합니다.”

주주 중에 재력가가 많았지만 1인당 주식 보유한도는 최대 3%로 묶었다. 제일투금이 특정 개인 것이 아니라 한국경제의 발전과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공공 금융회사임을 표방한 것이다. 이희건 회장이 1955년 오사카흥은을 창업할 때 취지와 같은 의미였다.

●명동 증권거래소 빌딩 매입

1981년 3월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과의 면담 직후 교포은행 설립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사진 나남.

제일투자금융은 이후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2차 오일쇼크가 몰아닥쳐 한국 경제가 불황의 늪에 빠진 1979년에도 새서울상호신용금고와 부민상호신용금고를 인수 합병했다. 예금과 대출도 각각 1000억원을 돌파했다. 한국이 본격적으로 경제개발을 시작한 1962년 이래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1980년 제일투금은 서울 명동의 옛 한국증권거래소 건물로 이전했다. 1920년 경성주식현물취인소로 쓰인 증권거래의 발상지로 1977년까지 한국증권거래소로 사용된 건물이었다. 현재 명동 아르누보센텀 빌딩 자리다.

이곳을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쳐 1층은 400평 규모 영업장을 만들고 2층엔 재일교포 기업들이 생산한 제품 전시장을, 3층에는 재일교포모국회관을 만들어 한국에 온 재일교포 관련 단체들이 회의장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희건은 제일투자금융 대표이사 회장으로 취임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전두환 신군부의 탄생은 희건에게는 위기이자 기회였다. 2차 오일 쇼크의 여파와 강원도 사북탄광에서 벌어진 광산노동자들의 유혈 폭동, 1980년 5월 전국 대학에서의 민주화 요구 대규모 시위로 한국 경제는 거대한 위기의 파고를 맞았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경제난 타개만이 민심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보고 김재익 박사에게 획기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줬다. 자율화 개방화 안정화의 경제정책 방향에 따라 1980년 10월 외국계 은행 설립 검토 방침이 발표된다.

1981년 5월 전두환 대통령과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과의 만남에서 희건은 신한은행 탄생의 물꼬를 트게 된다.(계속)

제일투자금융은 1980년 명동의 증권거래소 건물을 매입해 입주했다. 사진 나남.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최영해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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