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들 ‘작전’에 멍드는 중소기업

2009. 2. 21. 00:51이슈 뉴스스크랩

서울의 한 고급 일식집. ‘작전’ 멤버들이 모여든다. 조직폭력배 출신 자산운용사 대표, 부실 건설기업 대표, 유명 자산운용사 직원, 외국계 투자전문가 등이 두루 모인다. 이들이 모여 부실 건설기업에 대한 투자를 결정한다. 투자 대상 기업은 ‘수질개선 박테리아 연구’를 수년째 하고 있는 한결벤처. 작전 멤버에 새로 가담한 강현수가 한마디 거든다. “신약개발, 환경기술, 대체에너지. 전통적인 3대 작전 테마주죠.” 작전세력들은 실제 한결벤처의 연구 내용과 성공 가능성은 모른다. 아예 관심이 없다. 투자 결정 포인트는 연구 제목이다. 공시와 언론보도 등을 통해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개미투자자들이 모여들 것이고, 주가가 목표가까지 오르면, 팔아치울 심산이다. 당하는 것은 개미투자자요, 승하는 것은 작전세력이다. 여기까지는 영화 <작전>의 일부분이다.

» 인천 계양구에 있는 청호전자통신 공장 안. 한때 5개층 전체에서 생산라인이 가동되던 청호전자통신은 지금은 1층에서만 생산라인이 돌아가고 있다. 그나마도 물량이 없어 직원들은 일을 기다리는 게 일인 실정이다. 황윤정 청호전자통신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2007년 8월 기업 사냥꾼들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회사 경영권을 장악한 뒤 회사 경영 실적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고 말했다.

30년 전통 건실했던 제조업체가 어쩌다가

현실에서 <작전>은 얼마나 유효할까? 청호전자통신은 인천 계양구에 있는 중소기업이다. 30년 전통을 자랑하지만, 2007년 8월 회사 매출의 80%를 차지하던 수정진동자(휴대전화 등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부품)를 생산하던 중국 공장을 팔아버린 뒤 물량 주문이 급격히 줄었다. 청호전자통신은 2007년 영업손실 14억9천여만원, 2008년(9월30일 기준) 영업손실 50억8천여만원을 기록했다. 2007년에는 투자 등 영업외수익으로 당기순이익이 13억원 흑자였으나, 2008년엔 9월30일 현재 19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청호전자통신에서는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2007년 8월 당시 청호전자통신의 대표이사 지아무개씨는 경영이 어려워지자 회사를 인수·합병(M&A) 시장에 내놓았다. 이를 인수하기 위해 자산운용사를 포함한 9개의 법인과 개인이 모여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이 컨소시엄이 청호 주식의 41.59%를 소유하는 대주주가 돼 공동 운영에 들어갔다. 주식이 대량 거래되면서 당시 주가는 2620원 선에서 상한가인 3010원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이후 청호전자통신은 2009년 2월까지 대표이사가 다섯 차례나 바뀌었다. 컨소시엄을 형성한 개인과 자산운용사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서 대표이사가 손바닥 뒤집듯 계속 바뀐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경영 방침도 이어졌다. 제조업 회사에 들어온 컨소시엄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미지캐피탈’이라는 투자회사 설립이다. 청호전자통신에서 사업 다각화를 목적으로 설립한 이 투자회사로 빠져나간 돈은 20억원이다.

2007년 11월13일에는 ㅋ테크라는 인천의 한 회사에 투자를 결정했다. ㅋ테크는 태양광 부품·반도체를 만드는 데 쓰이는 진공장비, 태양전지 모듈을 만드는 데 쓰이는 실리콘 잉곳 장비 등을 만드는 제조회사다. 청호전자통신이 지금까지 이 회사에 투자한 돈은 117억여원이다. 그러나 투자 결정 당시 ㅋ테크의 경영 상태는 좋지 않았다. ㅋ테크는 2006년에 14억원의 흑자를 기록했지만 2007년에는 27억원의 적자로 돌아섰다. 청호전자통신이 투자를 결정할 당시는 매출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투자 기업에 대한 검토도 늦었다. 회사가 회계법인으로부터 ㅋ테크 주식 평가보고서를 받은 것은 그해 12월31일로, 투자 시점보다 약 50일 뒤다. 송덕용 회계사는 “회사가 50억원이 넘는 투자를 결정하려면 투자 이전에 그 기업에 대한 납득할 만한 검토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불충분했음을 보여준다”며 “회계법인이 결정한 가격인 5만4천원보다 두 배가량 높은 9만원에 신주를 인수한 대목도 의아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실제 1년이 훌쩍 지났지만 담보대출, 출자 등을 통해 ㅋ테크로 투자된 117억여원은 전혀 회수되지 않고 있다. ㄱ투자운용사 관계자는 “대체에너지 테마주로 주식투자 ‘재료’를 만든 셈인데, 실제 회사 경영 상태가 좋지 않아 무리한 투자로 보인다”고 말했다.

청호의 이상한 투자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지난해 8월, 청호전자통신은 개그맨 출신 사업가 주병진씨가 갖고 있던 속옷업체 ‘좋은사람들’을 인수하기 위해 기업 M&A를 주 사업으로 하는 ‘무한 13호 기업구조조정조합 ’(이하 무한조합)에 80억원을 투자한다. 80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50억원어치 발행하고, 회사 건물을 담보로 30억원을 빌린다.

인수 실패 투자금만 날려

이 투자자금으로 무한조합이 직접 좋은사람들을 인수하는 것이 아니라, 올아이원(옛 베비라)이라는 회사가 다시 무한조합의 전환사채를 인수하고, 이 올아이원은 이스트스타어패럴이라는 신규 설립 회사에 80억원을 대여한다. 결국 이스트스타어패럴이 좋은사람들의 지분을 인수했다. 그러나 이스트스타어패럴은 다시 경영권 지분을 투자회사인 지앤지인베스트에 넘겨버렸다.

이 과정에서 애초 투자자인 청호전자통신은 80억원 중 한 푼도 회수하지 못했다. 수익률 20%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월 4.5%의 이자만 내고 있다. 노기원 청호전자통신 대표이사는 “베비라가 좋은사람들을 인수하면 둘 다 대리점 영업을 하는 의류회사여서 시너지가 발생할 것 같아, 그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었다”며 “자금 회수를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송덕용 회계사는 “투자의 기본은 명확한 목적과 과정인데, 애초에 베비라와 좋은사람들 합병을 통한 수익 창출이라는 목적을 밝히지 않았고, 과정도 복잡해 위험도가 큰 투자”라고 말했다.

» 2008년 9~11월 두 달간 재직한 백아무개 대표이사는 청호전자통신에서 회사의 목적사업과 무관한 곳으로 대여·출자된 금액 상황이 사실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한 문서.

일련의 사건 뒤에는 ‘작전의 귀재’로 불리는 제3의 인물인 김아무개씨가 있다. 그는 지금은 상장폐지된 모디아라는 회사의 대표이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모디아의 주가가 2만원에서 11만원까지 오르자 ‘신흥부자’ ‘떠오르는 코스닥 황제’ 등으로 불렸다. 그러나 가장납입 등 주가조작으로 2003년에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바로 그가 2007년 8월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 청호전자통신의 주식을 사고,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다른 사람을 대표이사로 내세워 주식을 양도했던 것이다. 김씨는 컨소시엄 내부에 이해관계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자신의 관계자들로 주식 소유자를 바꿔왔다.

정종남 투기자본감시센터 기획국장은 “제조업체에 투자를 주로 하는 ‘세력’이 들어오면, 회사의 장기적인 경영과 무관하게 경영진이 수시로 바뀐다”며 “심지어 자기 자본 없이 들어온 무자본 M&A 세력은 그 위험변수가 더 커져 그 과정에서 제조업체 본연의 경쟁력은 사라지고 만다”고 말했다. 경기불황과 맞물려 호재가 하나도 없는 청호의 주식은 2월9일 현재 570원대로 바닥을 기고 있다.

몰락한 황제주 모디아 대표도 개입

회사 경영진의 이상한 경영 행태를 참다 못한 직원들은 지난해 11월 회사 전·현직 경영진 16명을 고소했다. 황윤정 청호전자통신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2007년 8월 회사 경영이 컨소시엄에 넘어간 뒤, 청호전자통신의 자금은 제조업이라는 회사의 목적사업에는 단 한 푼도 투자되지 않았다”며 “이사진들의 이해관계에 있는 회사나 개인들에게 출자와 대여 형식으로 회사의 자금 360여억이 빠져나갔고, 출자 형식의 자금은 또다시 다른 회사들을 인수·합병하는 데 사용돼 청호전자통신이 심각한 도산 위기에 빠졌다”고 말했다. 이런 투자를 한 이유에 대해 노 대표이사는 “제조업이 사양길이라 지금 당장 수익을 낼 수 없으므로 투자로라도 수익을 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결국 현실의 ‘작전’으로 당하는 것은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2월9일 기자가 찾아간 청호전자통신 5층 사업장에선 10여 명의 여성들이 정수기 등에 들어가는 전자회로판을 만들기 위해 작업을 하고 있었다. 8년째 일하고 있는 김현희(41)씨는 “경기가 안 좋다고 하지만, 이렇게 물량이 없는 것도 처음”이라며 “사장이라는 사람은 자꾸 바뀌고, 새롭게 증설하는 라인도 하나 없고 불안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 옆에서 일을 거들던 신아무개(38)씨도 “요즘은 일이 없어서 히터 옆에 앉아 물량 주문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게 일”이라고 말했다.

코스닥 상장 기업 두 개를 인수한 경험이 있는 M&A 전문가 ㅎ씨는 “코스닥 상장사들 중 상당수는 이런 경우”라며 “자본은 있고 껍데기만 있는 회사에 투자자들이 들어가는 의도는 주가 놀음을 통해 주식으로 이익을 보거나 회사의 자금을 여러 가지 경로로 빼내기 위한 것인데, 청호의 경우는 후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청호전자통신 주식 220만 주가 지난 2월6일 95억원에 거래됐다. 최대 주주인 노 대표이사가 보유한 주식 전량을 경영권과 함께 판 것이다. 당시 주가는 주당 520원이었지만 장외에서 거래된 가격은 이보다 9배 높은 4600원이었다. 상장된 기업의 경영권을 인수하는 데 따른 ‘상장 프리미엄’이 더해진 액수인 셈이었다.

대표이사는 경영권 프리미엄 받고 팔아

청호전자통신을 인수한 회사는 거래가 일어나기 이틀 전인 2월4일 설립등기를 했다. 서울 강남의 한 오피스텔 건물에 사무실만 있다. 전문가들은 “상장 프리미엄은 정해진 룰이 없기 때문에 위법한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거래”라고 입을 모았다. 경영 상태가 좋지 않은 회사를 그 정도의 돈을 주고 인수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구린 냄새가 나는 거래”라고도 했다.

정종남 투기자본감시센터 기획국장은 “2005년 파산한 오리온전기도 사모펀드 등 제조업 경영 의지가 전혀 없는 투자세력이 들어가 회사를 망친 경우”라며 “제조업이라면 제조업 경험이 있는 투자자가 기업 경영권을 인수하도록 대주주에 대해 엄격하게 심사를 하는 등 규제가 있어야 이런 피해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