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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수도 없이 마주치는 ‘세일’ 플래카드들. 봄·여름·가을·겨울 정기 세일은 이제 세일 축에도 못 낀다. 경기 불황이 이어지면서 각 브랜드에서는 새로운 세일로 재고 정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패밀리 세일, 파이널 세일, 총력 세일… 브랜드의 ‘수’가 뻔히 보이면서도 ‘세일’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여자의 마음! 그대들에게 세일주의보를 발령한다.
지난 봄 극장가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찔리는 영화가 개봉됐다. 이름하여 <쇼퍼홀릭>. 지나친 쇼핑으로 빚더미에 앉아 매번 쇼핑을 끊겠다고 결심하면서도 다시 ‘세일’이라는 말에 무너지는 주인공 레베카를 그린 영화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나 싶지만, 이게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닐 터. ‘쇼퍼홀릭에 빠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순간’을 묻는 한 설문조사(출처 티켓링크)에 따르면 1위로 ‘빅 세일’ 문구가 적힌 쇼윈도를 볼 때(81.92%)가 꼽혔다. 2위는 ‘한정 판매’ 프리미엄이 붙을 때(7.91%). 쇼핑시 신상품보다는 세일이 먼저라는 결론이다. 특히 요즘 같은 불황기에 세일은 꼭 필요한 마케팅 기술. 실제 지난해 말부터 ‘세일’은 ‘불황’ ‘실속형 소비’ 등과 함께 2009년 소비 트렌드 10대 키워드로 떠올랐다. 계열사 가족을 초대한다는 패밀리 세일, 1년에 두 번 팔다 남은 아이템 총정리를 위한 파이널 세일, 기자를 비롯한 관련 업계 종사자들을 초대하는 프레스 세일 등 이름도 가지가지다. 이름만 다르지 팔다 남은 상품을 처리하려는 기본 취지는 똑같다. 프레스 세일은 그나마 제일 낫다는 평판. 하지만 일반인 접근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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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 주부들의 세일 참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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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1 창고 개방과 다를 바 없던 패밀리 세일 평소 좋아하는 브랜드의 패밀리 세일 소식을 접한 주부 이아무개 씨는 최근 패밀리 세일에 간 일이 후회막급이란다. 남편 거래처라 패밀리 세일 티켓을 건네받은 이씨. 초대장부터 고급 브랜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는데…. 결론은 시간 낭비였다. 아동복부터 여성복, 남성복까지 아우르는 브랜드라 친정 언니네까지 동행해 일요일 아침부터 서둘러 행사장으로 향했지만 만원사례. 웬걸, 들어서니 브랜드 ‘창고 개방’과 다를 게 없었다. 상상 속 고급 브랜드의 이미지는 어디로 가고, 팔다 남은 허접한 물건들만 바닥에 널려 있었던 것.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생각에 하나라도 건져볼까 싶어 다리품을 팔기를 두 시간, 손에 잡히는 건 한두 개뿐이었다. 더욱 가관은 행사 아르바이트생들이 새로운 물건(상자)을 꺼내 올 때였다. 구름 같은 인파가 옷을 사이에 두고 며칠 굶은 하이에나처럼 서로 잡아당겼다. 피팅룸은커녕 사이즈 안내도 제대로 안 해주는 불친절도 쇼핑을 후회하게 만든 요인들. 벽에 브랜드별 사이즈 해독법 플래카드만 붙여놓고 누구도 질문에 제대로 답해주지 않는다. 이날 세 시간 쇼핑한 끝에 이씨가 구입한 건 남편 셔츠 한 장이 전부. 자신의 재킷도 하나 집었지만, 정말 쌀 거라는 추측과 달리 결제 코너에 가서 18만 원이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내려놓았단다.
CASE 2 파이널 세일 결과는? 충동구매 파이널 세일 경험기도 그다지 좋진 않다. 평소 입히고 싶었지만 비싼 가격에 포기해야 했던 브랜드의 파이널 세일 소식을 듣고 행사장으로 향한 주부 윤아무개 씨. 패밀리 세일과 달리 티켓도 필요없다고 했다. 하지만 들어서자마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는데. 수많은 인파에 옷에서 나오는 먼지까지 더해지니 행사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그런데도 70퍼센트 세일이라는 사실에 흥분해가며 정신없이 옷을 고른 윤씨는 결제 코너에 가서야 벽에 붙은 ‘환불·교환 불가’라는 표기를 보고 깜짝 놀랐단다. 이날 윤씨가 결제한 금액은 무려 38만5천 원이다. 집에 돌아와보니 욕심에 산 옷이 절반을 넘었다고. 싸다는 말에 큰 사이즈까지 골라 벌써 세 계절째 옷장 속에 얌전히 걸려 있는 옷도 서너 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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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80% 할인율에 속지 말 것! 세일 쇼핑시에도 기술이 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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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이 많은 세일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은 뭘까? 전문가들은 필요한 아이템 선정이 시작이라고 말한다. “구입할 아이템 정리가 우선이죠. 어떤 옷이 필요한지 결정하고, 그 아이템만 집중적으로 찾아야 해요." 스타일리스트이자 쇼핑몰 제이미샵을 운영하는 김경희씨의 얘기다. 아이템을 선정해두지 않으면 옷더미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 빈손으로 나오거나, 애꿎은 아이템만 구입한 뒤 후회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60, 70, 80%… 갈수록 높아지는 할인율에 목매지 말라는 조언도 덧붙인다. “세일가에 흔들리면 끝이 없죠. 원하는 아이템이 없다면 과감히 행사장을 나서야 해요.” 할인율에 현혹돼 이것저것 사다 보면 불필요한 지출만 는다는 얘기다. 평소 패밀리 세일을 즐겨 찾는다는 스타일리스트 성문석씨는 패밀리나 파이널 세일시에는 몇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고 일러둔다. 일단 마음을 비우고 시작하라는 것. 평소 좋아하는 브랜드라 해도 본인이 원하는 똑같은 모델(아이템)은 100퍼센트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인기 있는 아이템이 패밀리 세일까지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맘에 드는 아이템을 찾았다면 일단 손에 넣어두라 말한다. 일반 매장처럼 여유를 갖고 하나씩 입어보다가는 찜한 아이템이 고스란히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기 쉽다. 한 바퀴 둘러본 뒤, 픽업한 아이템을 하나씩 입어보고 다시 결정하라는 것. 이때 100퍼센트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반드시 내려놓고, 유행을 가장 덜 타는 무난한 스타일을 선택하는 게 성문석씨가 일러주는 성공적인 세일 쇼핑 팁이다. 옷보다는 경쟁이 덜한 소품이나 액세서리 등을 쇼핑하는 것도 방법이다.
끝으로 쇼핑을 둘러싼 한 재미난 연구결과를 살펴보자. 미국 카네기멜론대학교 경제심리학과 조지 로웬스틴 교수는 경제활동과 신경계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연구를 통해 쇼핑시 뇌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발견했다고 한다. 상품획득에 따른 기쁨과 지불의 고통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 그것. 기쁨과 고통의 갈등이라! 이게 어디 쇼핑 순간뿐이겠는가. 오랜 쇼핑을 통해 우리는 알고 있다. 기쁨은 순간이고, 고통은 오래 남는다는 것을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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