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탄광’에 녹색 허브가 핀다

2009. 7. 30. 18:35분야별 성공 스토리

검은 옛 ‘한보탄광’에 녹색 허브가 핀다 [조인스]

안씨 父女의 고집스런 에덴동산 프로젝트
“태백의 아버지 탄광, 딸이 천연단지로 리모델링”

이코노미스트 안씨 부녀(父女)의 꿈이 여물고 있다. 탄광에서 허브를 키우겠다는 야심만만한 꿈이다. 안종범(61) 전 대한석탄협회장과 그의 딸 안미현(34) 미현재 대표가 주인공. 이들은 강원도 태백시 한보폐광 부지 560만㎡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천연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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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서부 콘월주의 세인트 오스텔시. 이곳은 폐광촌이었다. 지역 1인당 총생산이 영국 평균의 60%(1997년)에 불과할 정도로 빈곤에 허덕였다. 참다 못한 시민이 나섰다.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15만㎡ 규모의 폐광산 채굴장을 사들여 식물원으로 만들었던 것.

여기에 100만 종이 넘는 식물을 심었다. 폐광촌 오스텔시의 기적은 입소문에서 시작됐다. ‘폐광이 식물원으로 변신했다’는 소문을 들은 관광객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몰려들었다. ‘에덴동산 프로젝트’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관광객은 평균 5일간 이곳에 머물면서 지갑을 열었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흥미를 느꼈던 모양이다. 2001년 개장 후 이 식물원이 벌어들인 돈은 7억 파운드(한화 1조4000여억원). 폐광이 금맥으로 거듭난 사례다. 석탄에서 석유로…. 1989년 에너지 정책의 전환으로 국내 석탄산업이 기로에 섰다. 문을 닫는 탄광이 속출했고, 지역경제는 덩달아 움츠러들었다. 광부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던 지역은 졸지에 생기를 잃었다.

1988년 11만5000명에 달했던 주민 수가 5만여 명으로 반 토막 난 태백시 사례는 대표적이다. 지난해 말 폐광 수는 2333개. 통계에 잡히지 않은 수는 훨씬 많다. 불법 조성된 탄광 때문이다. 문제는 폐광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폐광을 방치하면 갱도에 물이 고이기 일쑤다.

이 물이 하천·토양에 스며들면 환경오염을 피할 수 없다. 폐광 붕괴도 걱정거리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국가는 수백억원의 예산을 쏟아 붓는다. 이른바 광해(광산개발에 따른 피해)관리사업비다. 올 예산은 740억원. 여기엔 추경 100억원도 포함돼 있다. 한국광해관리공단 강희종 과장은 “책정된 광해관리사업비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며 “2007년, 2008년 이월된 예산이 없을 정도로 (살림살이가) 팍팍하다”고 말했다.

폐광에 돈을 붓는다? 아무래도 낭비로 보인다. 폐광은 유지·관리하는 것 외엔 별다른 쓸모가 없다.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 환경파괴와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폐광은 그야말로 계륵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낭비를 막는 방법은 폐광을 재활용하는 것이다.

영국 오스텔시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엔 이런 사례가 있을까? 강원도에선 지금 한국판 ‘에덴동산 프로젝트’가 한창이다. 천연비누 전문기업 미현재는 태백시 통동에 있는 옛 한보탄광(2008년 6월 폐광처리) 부지 560만㎡에 녹색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아시아 최대 규모다. 사업비는 3850억원. 부지매입은 물론 인허가도 마쳤다.

올 4월 태백시와 천연단지 개발사업 관련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일본 유수의 천연기업 ‘생활의 나무’와 기술제휴도 마쳤다. ‘생활의 나무’는 허브를 일본에 처음 소개한 기업. 일본 내 천연단지 400여 곳을 세팅한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부전여전 경영학 … “불가능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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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단지 조성부지 중 라벤다 등 허브를 재배하는 면적은 99만㎡. 여기엔 세계 각지에서 자생하는 3000여 종의 허브를 선별해 심는다. 태백 자생식물 100여 종도 도입한다.

재배면적은 어마어마한 규모다. 일본의 대표적 천연단지 ‘팜 도미타’(24만7500㎡) 의 4배에 이른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천연제품도 상당할 전망. 가령 99만㎡에 허브를 심으면 연간 허브백 2500만 개(2.5g)를 생산할 수 있다.

라벤다를 식재하면 크림 100만 개(30g), 스킨 50만 개(150mL)를 만들 수 있다. 이를 통해 미현재는 연간 1000억원 매출에 관광객 300만 명을 유치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회사 안미현 대표는 “허브·라벤다를 이용한 비누·화장품 등 친환경 제품뿐 아니라 태백의 자생식물 및 특산품도 상품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허브’ 태백 한우 스테이크를 선보이겠다는 얘기다.

안 대표는 또 “장기적으로 이 천연단지를 관광 브랜드화해 천연원료 재배지로 적합한 동남아시아 등지에 수출할 계획도 짜고 있다”고 강조했다.

재배면적을 제외한 나머지 461만㎡엔 숙박시설·체험실·박물관 등이 들어설 예정. 갱도 역시 재활용할 계획이다. 한보탄광은 국내에선 드물게 수평갱도가 많다.

총 42㎞ 중 2.7㎞가 평평하다. 미현재는 이곳에 갱도 관광열차를 운영한다. 할리우드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서 착안한 것이다. 신인 화가를 발굴하기 위해 갱도 미술관을 만들 구상도 가지고 있다. 이런 시설물은 이르면 올해 말부터 단계별 착공할 예정이다. 문제는 갱도에서 유해가스가 새어 나오느냐다.

일부 폐광의 갱도는 유해가스 탓에 재활용이 아예 불가능하다. 안 대표는 “2007년 말 키스트 문길주 부원장, 최재영 박사와 공동 탐사한 결과 ‘문제없다’는 결론을 얻었다”며 “한보탄광은 유해가스가 전혀 나오지 않는 무공해 폐광”이라고 했다.미현재와 태백시는 8월 중순, 천연단지 조성부지 중 일부 지역에 허브를 시험 재배한다.

복토작업은 마무리했고, 식재행사만 남았다. 한국판 에덴동산 프로젝트, 이제부터 시작이다. 장마가 끝나고 폭염이 시작되는 날, 이들은 마도로스 옷으로 갈아입고 ‘에덴’이라는 녹색바다로 출항할 것이다. 안 대표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다. “탄광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한 2006년을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시작이 반이기 때문에 더욱 치밀하게 준비할 계획입니다.”

그렇다. 모든 사업은 산고의 고통이 따르게 마련. 어떻게 준비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 미현재도 그랬다. 이들의 에덴동산 프로젝트는 출발 전 좌초될 뻔했다. 여기엔 흥미로운 뒷얘기가 있다. 이른바 안씨 부녀의 고집경영 이야기다. 한보탄광의 리모델링을 제안한 것은 안 대표의 부친 안종범 전 대한석탄협회장이었다.

한보광업소 대표로 재직 중이던 안종범 전 회장은 2005년 극심한 경영난에 속앓이를 했다. 연간 평균 생산량 28만2000t의 절반도 추출하지 못할 지경이었기 때문. ‘그냥 가느냐 감산하느냐….’ 하지만 이 역시 어려운 결정. 가뜩이나 당시는 석탄산업이 위축된 시기였다.

만약 감산하면 수십억원에 이르는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뾰족한 답을 찾기 어려웠던 안 전 회장은 대체산업을 구상했다. 처음엔 유수의 컨설팅 업체에 용역을 맡겼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십중팔구 ‘골프장 아니면 리조트를 만들라’. 고집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안 전 회장으로선 성에 찰 리 만무했다.

그는 “골프장·리조트 사업은 초기 투자비용이 많고, 고객을 유인하는 것도 쉽지 않다”며 “갱도에 들어간 듯 눈앞이 캄캄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시기, 안 전 회장의 딸 안 대표는 상한가를 치고 있었다. 2003년 설립한 천연비누 전문기업 미현재는 외국계 기업과 자웅을 겨루는 토종업체로 성장했다. 유명 백화점에서 납품계약이 쇄도할 정도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고집경영이 폐광 리모델링 불씨 살려

이 회사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대략 7% 안팎. 국내 브랜드 가운덴 독보적 1위다. 연 매출은 120억원. 올해엔 지식경제부가 선정하는 ‘세계 일류 기업’에도 선정됐다. 이런 그에게 부친 안 전 회장이 SOS를 친 것은 2006년의 일이다. “한보탄광의 대체산업으로 무엇이 좋은지 고민해 달라.” 안 대표는 생각에 빠졌다.

‘탄광에서 할 수 있는 게 뭘까?’ 그는 사내에 TF팀을 만들고 불철주야 고민했다. 전공은 무시하기 힘든 법. 천연사업 외엔 별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TF팀 관계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허브단지 어떨까요?” 직원들은 손사래를 쳤다. 탄광에서 허브를 키운다는 발상은 남극에 수영장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예로부터 안씨 고집은 유명하다. 안 대표도 쉽게 뜻을 접지 않는다. 한번 결정하면 뒷방으로 은근슬쩍 꽁무니를 빼는 법도 없다. 안 전 회장처럼 말이다. 부전여전이다. 안 대표는 탄광 리모델링 사례를 찾기 위해 혼신을 쏟았고, 안 전 회장 역시 후방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08년, 안 대표와 TF팀 관계자들은 일본 후라노(富量野)의 도미타 팜 성공사례를 발견했다. 앞서 언급했듯 도미타 팜은 세계적 천연단지. 라벤더 보랏빛 꽃과 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놀랄 만한 사실은 연 10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는 것. 연 매출액은 8억 엔에 달했다.

더구나 이 단지는 일본의 대표적 탄광지 유바리(夕張) 인근에 있었다. 유바리는 이시카리 탄전의 중심 도시다. “탁! 탁!” 안 대표는 무릎을 두 번 내리쳤다. 한보탄광의 조건과 꼭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안 대표는 곧장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안 전 회장과 평소 탄광 대체산업에 관심이 높았던 태백시 관계자가 동행했다.

안씨 부녀 일행은 1박2일간 도미타 팜 농장과 천연제품 생산시설을 꼼꼼히 둘러봤다. 당시 이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도미타 팜 사례를 벤치마킹하면 탄광 리모델링 프로젝트는 성공 가능성이 충분하다.”한보탄광 리모델링 사업은 이런 진통 끝에 시작됐다. 태백시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도, 일본 ‘생활의 나무’와 기술제휴를 맺은 것도 도미타 팜 농장을 방문한 직후였다.

안씨 부녀의 고집경영이 꺼져가던 에덴동산 프로젝트의 불씨를 되살렸다는 얘기다. 하지만 안 대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말한다. 한 치의 실수도 범하지 않기 위해 틈만 나면 태백행 자동차에 오른다. 어떤 천연식물이 과연 태백에서 잘 자랄지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구상대로라면 한국판 에덴 프로젝트는 녹색성장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무엇보다 쓸모없는 폐광의 자원화가 가능하다. 폐광에 투입되는 애먼 돈도 절약할 수 있다. 지역경제 또한 육성할 수 있다. 일석삼조 효과다. 이들의 고집스러운 에덴 프로젝트에 관심이 모아지는 까닭이다.

한보탄광은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에덴의 동쪽’ 촬영지로 유명하다. 한보탄광 입구엔 ‘에덴의 동쪽 촬영장소’라는 커다란 간판이 서 있다. 하지만 얼마 후 이곳엔 진짜 에덴동산이 만들어진다. 칠흑 같은 폐광에서 녹색 허브가 피어오른다는 얘기다.

태백=이코노미스트 이윤찬 기자·chan487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