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 빚이 1000억… 아파트 800가구 모두 압류명령

2011. 9. 25. 10:44건축 정보 자료실

[Why] 조합 빚이 1000억… 아파트 800가구 모두 압류명령

1993년 재개발 아파트 상가 분양 _ 분양업체가 상인들 돈 받고 잠적
입주신청했던 상인들 조합과 대치 _ 리모델링해 상가 재분양
분양업체 부도나자 _ 주민들이 그 빚까지 떠안을 판

조선일보 | 석남준 기자 | 입력 2011.09.24 19:28 | 수정 2011.09.24 19:33

 

서울 서대문구 한 아파트에 사는 김모(33)씨는 추석 직전 법원에서 보낸 우편물을 받았다. 아파트 재개발조합이 빚을 졌으니 1900만원을 내라는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이었다. 김씨만 이 압류장을 받은 게 아니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모든 가구주(800여명)가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씩을 내야 한다는 통지문을 받은 것이다. 김씨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주민들이 사태 파악에 여념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건 이번뿐 아니라 앞으로도 가구당 평균 1억원의 추가 압류가 들어올 수 있다는 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파트 전 가구에 압류장이 날아온 것일까.

↑ [조선일보]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이 아파트는 1993년 입주를 시작했다. 이 일대 주민들이 조합을 만들어 지은 재개발아파트였다. 조합은 조합원이 입주할 아파트 외에 지하 3층 지상 5층짜리 상가를 만들었고, A분양업체에 230억원을 받고 파는 가계약을 체결했다. A업체는 이 가계약을 바탕으로 상가를 분양했고 입주를 신청한 상인 300여명에게서 310억원을 받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조합장이 건설사에서 수십억원대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는 등 검찰 수사가 시작되었고, A분양업체 관계자들도 이때 모두 잠적해버렸다. 그러자 이미 돈을 줘버린 상인들이 난감해졌다. A분양업체가 조합에 상가 매입 대금을 주지 않고 '먹튀'를 해버리자 조합에선 상인들의 상가 소유권을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이에 반발해 상가를 점거했다. 조합과 상인들의 대치 속에 상가는 10년간 '유령상가'로 방치되어 있었다.

2003년 1월 조합은 임시총회를 열었다. 상가를 리모델링 해서 다른 상인들을 상대로 비싼 값에 재분양하고 그 수익금 중 170억원을 점거 중인 상인들에게 되돌려주기로 결정했다. 그해 8월 조합은 B건설업체에 270억원을 받고 상가를 팔기로 했으나, 조합 간부들과 B업체 사이에 뒷돈 거래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돼 계약은 파기됐다.

같은 해 말 조합은 C분양업체에 270억원을 받고 상가를 매각했으나, 또다시 뒷돈 거래 의혹이 제기됐다. 분양 초기 구속됐던 조합장이 석방돼 '바지 조합장'을 내세워 한몫 챙기려 한다는 말이 돌았다. 주민 고모(72)씨는 "C업체가 헐값에 상가를 사들이는 대가로 전 조합장 측에게 100억원을 줬다는 얘기가 나왔다"면서 "전 조합장이 '조합고문'이라는 직함을 달고 실제 조합장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말이 파다했다"고 전했다.

상가를 매입한 C업체는 97억원을 들여 리모델링 공사를 했고 이후 199명에게 상가를 분양해 중도금 명목 등으로 114억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C업체는 상가 건물을 담보로 저축은행과 사채업자로부터 각각 100억원과 93억원을 빌렸다. 그런데 C업체가 2004년 11월 돌연 부도가 났다. 조합이 상가를 팔고 C업체에서 받아 놓은 270억원짜리 당좌수표도 휴짓조각이 되었고, 새로 상가를 분양받은 상인 199명도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C업체가 사업 도중 부도가 나면서 상가 소유권은 다시 조합으로 넘어왔다. 이렇게 되자 조합은 C업체의 채무까지 떠안게 됐고, 상인들로부터는 분양 대금을 돌려달라는 이중 압박을 받게 되었다.

상인들은 2007년 조합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1993년 입주 당시 최초로 상가를 분양받았던 상인들이 170억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한 것. 조합은 1심에서 패소했고, 2008년 항소했지만 고등법원도 상인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170억원을 상인들에게 주기로 한 2003년 조합 임시총회의 합의 내용이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상인들은 이 판결을 근거로 조합에 돈을 요구했지만, 조합엔 돈이 없었다. 상인들은 조합 대신 그 구성원인 조합원을 상대로 채권 압류를 진행했다. 그래서 이번에 아파트 전 가구에 채권 압류 명령이 들어가게 되었다. 문제는 조합원이 아닌, 나중에 아파트를 매입한 일반 가구주에게도 압류 명령이 나왔다는 것. 일반적으로 재개발 아파트 분양이 완료돼 소유권 이전 등기가 이뤄지면 조합은 해체되고 조합원 신분도 사라진다. 하지만 이 아파트의 경우 상가 분양을 둘러싼 분쟁으로 인해 조합이 여전히 살아있는 조직이 되면서 최근에 아파트를 산 사람도 조합원 지위를 승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아파트의 소유권 등기는 2006년 이뤄졌는데, 현재 800여 가구 중에 80%가 2006년 이후 이 아파트를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주민 대다수가 영문도 모른 채 170억원을 물어주게 됐을 뿐 아니라 조합의 다른 채권자들로부터 비슷한 요구를 받을 가능성이 커지게 됐다. 조합은 170억원 외에도 800억원의 다른 채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변호사는 "조합에 돈을 빌려준 은행 등 채권자들이 이번 압류 및 추심명령이 실제로 어떻게 될지 지켜보고 있다"며 "주민들이 돈을 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비슷한 소송이 잇따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이전에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며 "조합원의 지위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지 현재로선 애매한 상황"이라고 했다.

주민 김모(31)씨는 "조합이 뭔지도 모르고, 잘 살고 있었는데 앞이 캄캄한 상황"이라며 "아파트를 살 때 조합 등기부 등본을 확인해 볼 생각을 누가 하겠느냐. 채무가 많아 등기부 등본이 40장이 넘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이 아파트 조합장은 5차례나 바뀌었다. 2008년 취임한 현 박모(75) 조합장은 "이 정도로 엉망인 줄 알았다면 조합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정리를 하기 위해 조합장이 됐는데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고 했다. 그는 또 "조합에서 갚아야 하는 돈이 애꿎은 주민들에게 부과된 상황"이라며 "조합장으로서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