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료 공화국’ 너무해요

2011. 10. 19. 09:01이슈 뉴스스크랩

집 담보 대출받았다고 떼고… 빌린돈 일찍 갚았다고 또 떼고… ‘수수료 공화국’ 너무해요

다섯달 금융거래에 80만원… 금감원 “ATM 수수료 인하”

동아일보 | 입력 2011.10.19 03:13 | 수정 2011.10.19 08:49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몰랐다.

오상혁 씨(41·회사원)는 6월 초 경기 고양시의 자기 집을 담보로 8000만 원을 대출받아 서울 양천구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갔다. 은행 직원이 근저당설정비로 56만 원과 신용평가 수수료 5000원을 내라고 했을 때 오 씨는 '금리가 낮은 은행 대출을 받은 게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사 가는 날, 잔금을 치르기 위해 우리은행에서 발행한 3000만 원짜리 수표를 집주인의 하나은행 계좌로 송금하면서 수수료 3000원이 들었다.

은행 영업시간이 지난 저녁이나 휴일에 현금자동지급기(ATM)를 많이 이용하는 오 씨에게 수수료 몇천 원은 그저 일상이었다. 오 씨는 최근 5개월간 12차례 ATM을 이용하면서 1만4400원을 수수료로 썼다.

은행만 수수료를 매기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 주식투자를 하는 오 씨는 8월 증시 폭락으로 투자금이 거의 반 토막 나자 더 참지 못하고 주가가 다소 회복된 지난달 남은 주식을 모두 처분했다. 1000여 만 원을 투자해 500만 원을 겨우 손에 쥐었지만 증권사는 거래수수료 명목으로 2500원을 뗐다. 이 돈을 채권형펀드에 넣자 증권사는 '선취수수료'라면서 5만 원을 공제했다.

꾹 참던 오 씨가 폭발한 것은 이달 초였다. 만기도래한 정기예금 3000만 원으로 은행 대출금을 갚으려고 하는데, 창구 직원이 대출금 중도상환수수료로 16만 원을 요구한 것. 발끈한 오 씨는 "빌린 돈을 갚는데 무슨 수수료를 내느냐"고 항의했다.

은행 직원이 "금융기관으로선 상환금액만큼 이자를 못 받게 됐으니 수수료로 손해를 상쇄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 씨가 6월부터 최근까지 금융회사에 낸 수수료는 79만4900원에 이른다. 딸 민정이의 2개월 치 영어학원 비용이었다. 오 씨는 "푼돈이라고만 여겼던 수수료가 이렇게 부담이 될 줄 몰랐다"고 했다. 이른바 '수수료 공화국'이라고 부를 만하다. 지나친 수수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금융당국과 은행권이 수수료 인하에 착수했다. 일단 영업시간 중 자동화기기(ATM)를 이용할 때 부담하는 타행 인출수수료(800∼1000원)와 송금수수료(600∼1000원)를 절반 수준으로 낮출 것으로 보인다. 금융감독원은 19일 은행의 수수료 담당자를 불러 불합리한 수수료 체계에 대한 개선 방안을 권고하기로 했다. 시중은행 개인금융부 관계자는 "원가 계산이 쉽고 은행 수익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ATM 수수료 위주로 내리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 종류만 200개… 年利 8% 할부에 3% 수수료 붙여 ▼


18일 금융계에 따르면 금융업권별 수수료는 은행 138개, 증권 20여 개, 카드 및 캐피털사 20여 개, 저축은행 18개 등 총

200여 개에 이른다.
어음보증료나 주식청약 수수료처럼 금융회사가 위험을 부담하거나 품이 들기 때문에 부담해야 하는 수수료가

있지만 근거가 미약하거나 납득하기 힘든 수수료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금융소비자가 부담하는 수수료가 주먹구구로

운용되는 것은 수수료를 만들 때 별도의 근거 법 없이 각 금융회사가 필요에 따라 수수료를 만들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수수료

개수와 요율 결정은 금융회사와 고객 간의 계약이라고 보고 대부분 업계 자율에 맡기고 있다. 실제 신한은행이 부과하는 수수료는

109건인 반면 우리은행 수수료는 195건에 이를 정도로 편차가 크고 수수료율이 제각각인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18일 금융권의 각종 수수료 문제와 관련해 "상식에 어긋나는 수수료는 개선하도록 금융사에 권고하겠다"고 말했다.

○ 2000만 원 대출에 60만 원 먼저 떼가

직장인 허모 씨(31)는 얼마 전 한 캐피털 업체를 통해 승용차를 구입했다. 대출금 2000만 원을 36개월 동안 나눠 갚는

조건이었다. 캐피털사가 할부금융 계약을 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취급수수료 60만 원을 가져간 것이다. 할부금리가 연 8%

이하라고 했지만 3% 안팎인 취급수수료 때문에 실제 허 씨가 체감하는 금리는 연 10%가 넘었다. 캐피털사 측은 "자동차 딜러에게

선지급하는 중개료가 고정돼 있어 취급수수료를 매기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권혁세 금감원장이 8월 말 캐피털사 사장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개인에게 부과하는 취급수수료를 없애라고 권고한 뒤 0.7∼1.5%인 신용대출 취급수수료는 거의 없어졌지만 3%

안팎인 고율의 할부금융 수수료는 여전히 고객들을 괴롭히는 요인으로 남아있다.

한 시중은행은 주택담보대출을 받으려던

주부 유모 씨(53)에게 담보대상 주택의 감정평가뿐 아니라 대출자 개인의 신용등급까지 평가해야 한다며 평가수수료 5000원을

청구했다. 유 씨는 "대출금 회수가 가능한지 평가하는 업무는 은행의 이익을 위한 것인데 왜 소비자가 그 비용을 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주식을 사거나 팔 때 내는 매매수수료에는 '증권유관기관 수수료'라는 항목이 포함돼 있다. 100만

원을 거래할 때 한국거래소는 33원, 한국예탁결제원은 13원, 금융투자협회는 8원을 수수료로 떼어 가는 것이다. 최근 부실이

불거진 저축은행들은 직원이 직접 대출받은 사람을 찾아가 원리금을 회수할 때 '수금수수료'라는 비용을 매기기도 한다.

금융회사들의 수수료 이익은 매년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 은행, 카드, 보험, 증권사를 계열사로 둔 4대 금융지주회사가 수수료

수혜를 가장 많이 봤다. KB금융지주는 올해 상반기 수수료 이익이 9973억 원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1300억 원 이상

급증했다. 우리금융지주도 수수료 이익이 작년 상반기 5452억 원에서 올해 상반기 6237억 원으로 늘었다.

○ "취약계층에는 수수료 면제해줘야"

금융회사들은 '비용이 드는 만큼 수수료를 매길 수밖에 없다'며 수수료 체계에 손을 대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새우깡 가격을 낮추라고 압박하면 새우깡 개수가 줄어들 듯 카드 수수료 낮추라고 하면 포인트나 서비스 혜택 축소가

불 보듯 뻔하다"고 했다. 시장경제에서 가격을 건드리면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부작용과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금융업은 공공재적 성격이 있는 만큼 비상식적 수수료 체계를 개편해 소비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신용카드 수수료는 카드 사용횟수를 기준으로 수수료를 매기는 현행 체계를 카드 사용총액 기준으로

바꿔, 건당 결제금액이 적은 영세 사업주의 수수료 부담을 줄여주자는 것이다. 한국금융연구원 이재연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에서는

은행과의 거래횟수가 적은 저소득자나 고령자 등 경제적 취약계층이 느끼는 수수료 부담이 높다"며 "미국 호주 등 일부 선진국

은행처럼 경제적 취약계층에게는 수수료를 면제하거나 깎아주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김철중 기자 tnf@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