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섬세한 손기술

2009. 4. 6. 00:11분야별 성공 스토리

양궁과 골프 하면 한국 여성의 힘이 떠오른다. 이 분야에서 한국 여성은 세계시장을 호령하고 있다. 여기에 휴대전화 생산직 여성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섬세하고 민첩한 한국 여성의 손기술이 휴대전화 시장에서도 먹히고 있단다.
LG전자 평택의 휴대전화 공장은 밤에도 쉬지 않고 단말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LG의 휴대전화가 ‘불황 속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비결은 뭘까. 중앙SUNDAY가 생산현장을 직접 다녀왔다. 다음은 기사 전문.

1일 경기도 평택의 LG전자 디지털파크.
50만㎡(약 15만 평)의 대지 위에 휴대전화와 DVD·광스토리지 등을 만드는 공장들이 자리 잡고 있다. 디지털파크 입구엔 ‘We can do it-Global Top 3(세계 3위, 우리도 할 수 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동행한 본사 직원은 “휴대전화는 이미 지난해 4분기에 세계 3위를 달성했다”고 했다. 지난해 4분기 휴대전화 업체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노키아 38.4% ▶삼성전자 17.9% ▶LG전자 8.7% ▶소니에릭슨 8.2% ▶모토로라 6.5%였다.

1000여 명이 일하는 이곳 휴대전화 공장은 주 5일 주야 2교대로 쉴 새 없이 돌아간다고 했다. LG전자 글로벌 생산물량의 50%를 이곳에서 책임진단다. 아레나·쿠키·샤인·뷰티 등 프리미엄 모델을 주로 만든다. 이 회사 단말생산팀 이상철 부장은 “(일이 너무 많아) 힘들어 죽겠다”면서도 표정은 밝았다. ‘불황 속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공장은 지금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지난 연말만 해도 이런 호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글로벌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면서 주야 2교대 생산체제를 주간 생산체제로 바꾸는 방안까지 심각하게 고려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뜻밖에 연말로 갈수록 주문이 쏟아져 주야 2교대 생산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일감이 넘치다 보니 자주 잔업을 할 뿐만 아니라 월 2회 이상 주말 특근까지 하고 있다.

생산라인 곳곳엔 공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캐치프레이즈가 눈에 띄었다.
‘낭비는 죄악이다. 지금이 최악이다!’는 구호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지금 상태를 개선하라는 남용 부회장의 메시지라고 했다. 남 부회장 직전의 최고경영자(CEO)였던 김쌍수 전 부회장 어록으로 회자되는 ‘마른 행주도 짜라’가 연상될 정도로 현장의 치열함이 묻어났다. 이상철 부장은 “불황 극복 차원에서 가공비 절감을 위한 낭비 제거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5무(無)정신’을 강조하는 알림판도 있었다. 5무는 ▶돈에 얽매이지 말고 어려운 환경을 뛰어넘는 지혜를 발견하자는 ‘무전(無錢)’ ▶아무리 높은 목표도 단계적으로 접근하면 달성할 수 있다는 ‘무불가(無不可)’ ▶성취했다고 자만하지 말라는 ‘무자만(無自慢)’ ▶경쟁업체의 전략을 따라가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무모방(無模倣)’ ▶편법을 쓰지 말고 처음부터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하라는 ‘무편법(無便法)’을 의미한다.

평택 공장이 처음부터 잘나갔던 것은 아니다. 2005년 충북 청주의 유럽식(GSM) 휴대전화 생산라인과 서울 구로의 미국식(CDMA) 휴대전화 라인을 옮겨 합친 것이지만 완전한 통합이 쉽지 않았다. 두 생산라인의 조직문화부터 달랐다. 오랫동안 생산을 해 왔던 CDMA 공장에서는 안정적이지만 과거 방식에 얽매이는 분위기가 있었고, GSM 라인은 신규 사업이다 보니 파격적이고 속도전에 능했다.

시장 흐름도 달랐다. 유럽이 주요 시장인 GSM 생산라인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가장 바빠진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 GSM 라인은 다소 한가해진다. 반면 CDMA 생산은 입학 시즌에 장이 선다. 한쪽은 바쁜데 다른 쪽은 인력을 놀려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LG전자는 두 생산라인의 통합을 결정했다. CDMA와 GSM 단말기의 계측장비가 다르기 때문에 생산라인을 분리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상식을 깬 것이다. 통합생산을 위해 투자금액을 1.5배 더 쏟아부었다. 이 부장은 “한 생산라인에서 CDMA·GSM·3세대(3G) 모델을 모두 생산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혼류 생산 시스템을 갖췄다”고 자랑했다.

이 같은 혼류 시스템은 이 회사가 ‘팔레트’라고 부르는 일종의 휴대전화 틀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팔레트는 이 회사 생산기술연구원과 생산 현장의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개발했다. 생산라인에서 조립 중인 단말기가 팔레트 위에 장착돼 라인을 타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생산라인에 단말기만 흘러가는 다른 업체와 다른 것이다. 단말기의 크기와 모양이 달라도 동일한 규격의 팔레트 위에 올리기 때문에 표준화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일일이 계측장비를 바꿔주지 않아도 된다.

덕분에 공정 자동화 비율이 높아졌다. 이상철 부장은 “예전에는 생산 모델을 교체하려면 길게는 이틀까지 걸렸지만 지금은 5~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며 “매년 20~30%씩 생산성이 높아져 왔다”고 했다. 통합 초기 48개였던 생산라인이 현재 20여 개로 줄어든 비밀도 여기에 있었다. 모델 교체가 빨라진 만큼 소비자의 다양한 기호에 맞춰 여러 모델을 효율적으로 내놓기도 쉬워졌다. 현재 이 공장에서는 100종의 휴대전화 모델을 생산할 수 있다.

평택 공장의 또 다른 강점은 최고의 손기술을 자랑하는 여성 인력이다. 이 공장 생산인력은 협력업체가 맡고 있는 포장 공정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여성이다. 중동·인도 등지에서 공장 견학을 온 고객들은 여성 직원만 일하는 광경을 보고 놀라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휴대전화는 세 개의 모듈을 조립하면 완성품이 되기 때문에 조립 공정은 간단한 반면, 복잡한 기능 실험을 해야 한다. 조립 공정이 많은 냉장고나 세탁기와는 큰 차이가 난다. 기능 실험에서 중요한 게 감성 실험이다. 이는 기계로는 잡아내지 못하는 문제를 오감(五感)으로 잡아내는 공정이다. 여성 직원들은 섬세하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하루 수천 개의 단말기를 살핀다. 이 부장은 “중국 공장에서는 휴대전화의 작은 스크래치(긁힘)를 발견하기 위해 현미경까지 사용한다는데 우리 직원은 한눈에 귀신같이 스크래치를 잡아낸다”며 “내가 봐도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그는 “지난해 유휴 남자 사원으로 구성된 생산라인 2개를 운영해 봤는데 생산량이 여성의 80%밖에 안 돼 중단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프리미엄 휴대전화 생산기지인 구미공장 방문은 성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공장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이 회사 구미공장 가동률은 100%에 달한다. 이 회사 홍보팀 박천호 부장은 “프리미엄 풀터치 스크린폰이 국내외에서 잘 팔리고 있다”며 “해외에서 3월 출시된 삼성 상반기 전략 폰인 울트라터치에 대한 선주문이 180만 대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전자는 프리미엄에서 보급형까지 다양하게 휴대전화 라인업을 갖췄고 시장 점유율도 세계적으로 고르게 분포하고 있어 글로벌 경기악화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췄다”며 “지난해 하반기 글로벌 업체 가운데 가장 높은 22%의 성장률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평택=서경호 기자